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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당(觀善堂)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英陽南氏 槐市派 令監宅0

49.9×106.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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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관선당(觀善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9.9×106.5
  • 건물명 관선당(觀善堂)
  • 공간명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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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선당(觀善堂)

관선당(觀善堂)

관선당(觀善堂)은 호은(濠隱) 남흥수(南興壽, 1813~1899)가 1888년(고종 25)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에 건립한 괴호서숙(槐濠書塾)의 강당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남씨(英陽南氏) 괴시파(槐市派) 영감댁(令監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6.5㎝, 세로 49.9㎝이다. ‘관선(觀善)’은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운다는 뜻으로, 『예기』 「학기(學記)」의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豫)라고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時)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손(孫)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마(摩)라고 한다[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濠池村)이라 부르다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년)이 문장으로써 원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 歐陽玄)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이 서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에 함창김씨(咸昌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 후 조선 명종 연간에는 수안김씨(遂安金氏)와 영해신씨(寧海申氏), 인조 8년(1630)에는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시거하였다. 그 후 3성(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괴호서숙 건립 시에 교유가 깊었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시가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구름과 안개는 아직도 향기롭고
계수나무 떨기는 어찌나 그윽한지
여기에 만서옹(남흥수)이 계시어
서당을 열고 옛 행적 굽어보았지
회포는 다함 없는 달에 비추고
문호는 만 리의 뱃길에 통하였네
단정히 거하며 참된 성정 길렀고
세상에는 담담하여 구함이 없었네
좋아하시는 것은 시와 서적들
오로지 후손 위해 도모하였네
생각이나 공부에 편벽되지 않았고
성과 경을 으뜸으로 삼으셨네
큰 뜻으로 고인을 사모하여
우러러 그 원류를 소급해 말하네
속박되지도 방자하지도 않고
흠뻑 젖어 그 속에서 노닐었네
모름지기 때에 맞추어 힘쓰는 일만
군자 평생에 근심할 일이지
학문하는 그대에게 바라노니
학문의 뜻 저버리지 마시게
기이하고 특별한 것 추구하지 말지니
우리 도는 본디 일상적인 것이니까 (서예가 遯石 양성주)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행체이다. 화려한 장식이 있는 틀 속에 넉넉한 공간을 두고 단정한 자태로 자리한 세 글자가 겸손하게 들어앉았다. 자간의 넉넉한 여백과 좌우의 보다 여유 있는 공간 그리고 상하에도 여유로운 공간을 두어 단정한 세 글자로 시선이 집중된다. 빠른 붓이 바삐 내달리더니 ‘雚(관)’ 자를 조형하고, 이어 힘을 더한 붓이 느린 걸음으로 짱짱한 ‘見(견)’ 자를 더하여 이루어 낸 ‘觀(관)’ 자에서 멀리 내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 힘 있고 느긋한 붓을 이어받아 좌우 균형을 이주며 조형한 ‘善(선)’ 자에서 단정한 모습의 모범을 보여주며 현판의 주제이면서도 뽐내지 않고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다. 첫 글자와 함께 좌우에서 ‘善’ 자를 옹위하는 듯 당당하게 서 있는 ‘堂(당)’ 자에서 다양한 변주를 하는 공간 구성을 보여주며 신선함을 부여한다. ‘善’ 자와 ‘堂’ 자가 끼워 맞추기를 하면 꼭 들어맞을 것 같은데 이로 인하여 차분한 안정감이 부여되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소개

남흥수(南興壽, 1813~1899)의 자는 치유(穉猶)이고 호는 호은(濠隱),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증조는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기형(紀衡)이고, 조부는 택만(澤萬)인데 호는 물소와(勿小窩)이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경괄(景适)이고, 어머니는 영천이씨 기응(箕應)의 딸이다.
유년 시절에는 종형인 해산(海山) 남기수(南箕壽, 1788~1837)에게 학문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에게 수학하였다. 1835년(헌종 1) 부친이 전염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항상 자식으로서의 정성을 다할 수 없었음을 평생 아픔으로 여겼으며, 벼슬하려는 생각을 끊고 효성으로 노모를 봉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슬픔으로 몸이 야위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당시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밤낮으로 걱정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하고 절약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몸만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문중에는 의장(義莊)을 마련하였고 집에는 서숙(書塾)을 두었고 마을에는 별도의 곡식 창고를 만들었으니, 계회(契會)의 조약이 분명해지자 어진 풍속이 행해지게 되었다. 일찍이 마음이 외물(外物)로 내달리는 것을 걱정하자, 정재 선생이 주자(朱子)가 유정춘(劉靜春)에게 답한 편지와 남헌(南軒)의 「자수명(自修銘)」을 써 주면서 면려(勉勵)하였다. 만년에는 입천(廿川)의 선정(先亭)을 중건하였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1887년(고종 24)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얼마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수영(李秀榮)과 학당(學堂)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1893년(고종 30) 집 곁에 따로 정자 하나를 엮어 헌(軒)에는 ‘만서(晩棲)’, 실(室)에는 ‘자수(自修)’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자서(自序)를 지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옛날 위나라 무공(武公)은 95세의 나이에도 오히려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워주도록 좋은 말을 해달라고 하였다. 내 나이는 그보다 아직도 열 살 정도 적으니, 어찌 늙었다고 여겨 수양을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질병이 있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 이외에는 늘 책상 앞에 앉아 읊조리기를,

“늙어서 책을 읽으니 참으로 맛이 있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편지를 보내 하례(賀禮)하기를,

“촛불 밝히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학문의 실마리를 더욱 많이 찾으시니, 대질(大耋 80세)의 정력(精力)이 어찌 이런 정도에 이르셨습니까.”

1899년(고종 36) 8월 2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7세였다. 영해부(寧海府) 남쪽 대곡(大谷) 부병(負丙)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부인 전주류씨(全州柳氏)는 사인(士人) 병휴(秉休)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감찰 유영(有𨥭)이고, 딸 하나는 김인락(金麟洛)에게 출가하였다. 유영의 세 아들은 조와(朝洼), 후사로 나간 조호(朝灝), 조응(朝鷹)이다. 딸 다섯은 박태중(朴泰鍾), 이상교(李相敎), 류동두(柳東斗), 이현각(李鉉覺), 박종대(朴鍾大)에게 출가하였다. 김인락의 양자는 희병(羲秉)이고, 딸 둘은 이만훈(李晩薰), 권교연(權敎淵)에게 출가하였다.
저서로는 『유선록(儒先錄)』, 『역대총록(歷代總錄)』, 『수견록(隨見錄)』이 있다. 또한 일찍이 무이(武夷)·도산(陶山)·고산(高山)의 기영(記詠)을 한 책으로 편집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암송하며 감발하여 흥기하는 단서로 삼게 하였다.
영해 지방에 터를 잡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조는 송정(松亭) 남수(南須, 1395~1477)이다. 남수는 당시 영해 5대 성씨 가문 중 하나였던 대흥백씨 가문과 혼인하면서 1420년(세종 2)경부터 영해 인량마을(나라골)에 살았다. 그 후 자손 남두원(南斗遠)이 1630년(인조 8)경 괴시마을에 처음 입향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양남씨족보』에는 남두원이 처음 괴시에 주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양남씨 괴시파(槐市派)가 괴시에 세거한 것은 약 4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벌의 두 아들인 남두건(南斗建)과 남두원의 후손들은 모두 괴시에 살고 있는데, 남두원의 후손들이 괴시파의 실질적인 중심축을 이루어 왔다. 남두원은 남붕익(南鵬翼), 남붕한(南鵬翰), 남붕구(南鵬九) 등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남붕익과 남붕한의 후손들이 아직도 괴시에 살고 있다. 현재 장남 남붕익의 후손들은 괴시파종택, 물소와고택, 주곡댁, 사곡댁, 영감댁, 경주댁, 천전댁 등에서 거주하며, 차남 남붕한의 후손들은 대남댁 종가와 영은고택, 해촌고택, 구계댁 등에서 거주한다.
영덕괴시리영감댁(盈德槐市里令監宅)은 호은(濠隱) 남흥수(南興壽)가 1847년(헌종 13)경 건립하였으며, 1938년에 그의 증손 남대철(南大轍)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까지 대문채, 방앗간, 마구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영감댁은 정면 4칸, 측면 6칸의 건물로, 마을의 주 가로에서 보면 사랑채가 정면처럼 보인다. 사랑채를 비롯한 모든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안대청의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여 가옥의 격식을 높였다. 문화재자료 제4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