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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헌(觀書軒)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27.0×55.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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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관서헌(觀書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27.0×55.5
  • 건물명 관서헌(觀書軒)
  • 공간명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 서예가 이수인(李守仁, 1690~1737)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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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헌(觀書軒)

관서헌(觀書軒)



관서헌(觀書軒)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에 위치한 오계서원(迃溪書院) 서재(西齋)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오계서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55.5㎝, 세로 27㎝이다. ‘관서(觀書)’는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詩) 제목에서 그 뜻을 취한 것으로, 명칭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이 迃溪精舍)를 건립할 당시에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어서 정한 것이다. 주희는 「관서유감」 시에서 “반 이랑 되는 네모난 연못에 거울 하나 열리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디에서 이런 맑음 얻었는가, 근원이 있어서 살아 있는 물이 오기 때문이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共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주희는 책을 연못에 비유하고 책 속에는 인간의 기(氣)와 감정을 초월하는 이(理)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덕홍은 관서헌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雲谷觀書理發揚 운곡에서 책을 보고 이치 드러내었고
更將心體噏方塘 다시 몸과 마음 네모난 연못에 들였네
至今會得當年意 지금에야 당시의 뜻 이해할 수 있으니
猶有源頭活水長 아직도 샘에는 길이 샘물 솟고 있다네

오계서원은 간재 이덕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건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1570년(선조 3) 여름에 간재 이덕홍이 그의 나이 30세에 태조봉(太祖峯) 남쪽 기슭[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천마을 동남쪽]에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迃溪精舍)를 건립하여 동재(東齋)를 관성재(觀省齋), 서재를 관서헌이라 하였다.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 병화로 정사가 퇴폐된 것을 1600년(선조 33) 장남인 선오당(善迃堂) 이시(李蒔, 1569~1636)가 오천마을의 서북쪽 쌍계(雙溪) 위에 옮겨 세웠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5월 21일 대홍수로 서당의 모든 건물이 유실되었고 관성재 현판만 오천에서 10리 떨어진 공신정(拱辰亭) 바위 아래에서 겨우 찾아내었다. 1663년(현종 4) 여름에 향내의 선비들이 사당의 건립을 논의하여 1665년(현종 6) 10월 도존사(道存祠)에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91년(숙종 17)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강당을 명륜당(明倫堂), 정문을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여 복설하였고, 1724년(경종 4) 사림의 공의(公議)로 선오당 이시를 추향하였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8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복설 및 중수 과정을 살펴보면, 1919년 복향하기 위하여 명륜당 등을 다시 세웠고, 이후 1973년 입도문을 중수하였으며, 1975년 관성재와 험위료(驗爲寮)를 중수하였다. 또 1977년 음력 3월 도존사를 중건하고 이듬해에 복향(復享)하였다. 그 뒤 1993년 12월 중순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주소(廚所)를 중건하였다. 2005년 1월 1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향례(享禮)는 매년 음력 3·9월 중정일(中丁日)에 행하고 있다.

글씨는 처음에 명필 한호(韓濩, 1543~1605)가 썼으나 대홍수로 유실되고, 지금의 글씨는 병암(屛巖) 이수인(李守仁, 1690~1737)이 쓴 해서체이다.

책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진리를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 ‘觀’ 자가 앞에 서서 분위기를 끌어 올린다. 반듯한 서고를 보는 듯 단정한 ‘書’ 자가 당당하게 써졌다. 뒤이어 정감 있는 ‘軒’ 자가 다소곳하게 자리하였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소개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굉중(宏仲), 호가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3년 뒤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에는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덕홍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고,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귀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 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덕홍은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똑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서재(西齋)인 관서헌(觀書軒)과 동재(東齋)인 관성재(觀省齋)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홑처마 맞배지붕에 한실골기와를 이은 3량가 납도리집이다. 평면은 마루방 1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가 깔려 있다.

참고문헌
  • 장재호·김우동 역, 『간재집』, 한국국학진흥원, 2018이재곤, 『오계서원』, 오계서원, 2008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