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에서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한국의 편액]은 모두 189개 문중·서원 등에서 기탁한 550점이다. 한국국학진흥원에는 현재 1,100여 점의 현판이 수장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현판이라 할 때 기문記文, 주련柱聯, 그리고 편액을 통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한다. 이에 반해 편액은 “건물의 입구와 처마 사이에 글씨를 새겨 걸어 둔 나무판”으로 정의하고, 편액에 해당하는 550점을 아시아·태평양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하였다.
모두 편액이란 동일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건물의 건축 목적에 따라 매우 다양한 종류의 구분이 가능하다. 본 신청서에서는 550점의 편액을 모두 4가지 부류로 분류하여, 이를 목록화 하였다. 4가지 분류는 다음과 같다.
- 교육 공간 :조상과 선현의 교육 이념을 담고 있는 공간
- 수양 공간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지만, 대체로 유유자적하는 선비들의 여유와 풍류를 담고
있는 공간.
- 주거 공간 :선현들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는 공간
- 추모 공간 :선현의 학덕을 추모,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
사실 이 4가지 분류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구분의 경계선이 매우 모호할 수도 있으며, 개념도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도산서원’ 편액은 교육의 공간으로 분류해야 하지만, 도산서원 내에 퇴계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尙德祠’는 추모의 공간으로 볼 수 있고,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樓는 유생들이 휴식도 취하고 때로는 교육의 장소로도 활용되는 곳이라 교육, 또는 수양의 공간 어디에나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 소유의 건물에는 이러한 구분이 더욱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목조 건축의 특성상 후대에 중수, 중건 등이 잦을 수밖에 없고, 중수, 중건 이후 본래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또는 편액을 다른 이름으로 교체하는 일도 잦았기 때문이다.
이에 본 해제에서는 몇 가지의 규칙을 정해서 전체를 4종류로 분류하였다. 이 구분은 완벽한 구분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포함된 구분이며, 연구자에 따라 충분히 분류를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첫째, 서원은 교육과 추모 등의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곳이지만, 일단 서원에 소속된 건물의 편액은 모두 <교육>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서원에 봉안된 인물의 추모를 위한 건물의 편액도 교육의 공간으로 분류하였다.
- 둘째, 편액에 새긴 문자의 의미로는 추모나 수양 등으로 분류될 수도 있으나, 애초의 건립 목적이 주거에 있었던 경우는
편액 문자의 내용과 상관없이 <주거>의 공간으로 분류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종 누정樓亭 등도 복합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지만 본래의 기능인 풍류의 기능을 우선하여 <수양>의 공간으로 분류하였다.
- 셋째, 추모의 공간은 <교육> 또는 <주거>를 위한 용도로도 자주 사용되지만, 역시 처음 건립 당시의 목적에 따라 <추모>의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 넷째, 건물의 본래 건축 목적을 알 수 없을 때는 문자의 뜻을 헤아려 분류하였다.
편액에는 글씨를 쓴 인물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으로, 선비들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의미하기도 하며, 아직 미완성의 글씨로 자신을 드러낼 만큼의 작품이 아니라는 선비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즉 조선의 선비들은 “글은 그사람과 같다[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의 예술적인 가치보다는 사람의 도덕적 가치, 정신적 면모가 글씨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여겨 아직 이름을 드러낼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겸손의 뜻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편액에는 글을 쓴 인물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일부 편액에서는 낙관을 찍어 글쓴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직업적인 서예가, 화가, 관직자 등으로 국한되어 있다. 한국의 편액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몇 명의 인물을 들면 아래와 같다.
편액의 글씨를 쓴 인물로는 우선 퇴계 이황(1501~1570)을 들 수 있다. 그는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명이며, 그의 주리파 철학은 일본 유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등재 신청한 편액 중 퇴계 이황이 쓴 글씨는 이요문二樂門·조양문朝陽門·설월당雪月堂·고산정孤山亭·선몽대仙夢臺·월천서당月川書堂·성재惺齋 등이 있다. 조선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가 쓴 6점의 글씨가 남아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화경당和敬堂·만취당晩翠堂·양진재養眞齋·태고정太古亭·탁청정濯淸亭 등 6점으로, 한호는 국왕으로부터 글씨를 인정받아 각종 외교문서의 작성을 도맡아 쓴 인물이다.
미수체眉叟體란 독보적인 글씨체를 남긴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의 충효당忠孝堂·백운정白雲亭·경류정慶流亭 등은 허목만이 가진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정조대의 화가로 이름을 날린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는 담락재湛樂齋·이가당二可堂 등의 글씨를 남겼다. 특히 김홍도는 화제畫題로 쓴 글씨는 남아 있으나 대자大字 글씨는 남은 것이 없이 더욱 희귀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근대의 인물로는 9점의 편액 글씨를 남긴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1845~919)의 글씨가 돋보인다. 그는 판서까지 지낸 인물로, 한말 미남궁체米南宮體의 대가로도 유명하다. 글씨의 대소 변화가 자유로우면서도 비정형非定型의 느낌을 주는 글씨체이다. 무릉정武陵亭·수신와須愼窩·눌산재訥山齋·관란觀瀾·충효당忠孝堂·덕봉정사德峯精舍·영모당永慕堂·선오당善迃堂·景慕齋 등이 있다. 또한 소우小愚 강벽원姜璧元(1850~9145)의 글씨는 해외에도 알려졌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림으로도 이름을 날린 인물로, 서예 이론서인 『노정서결蘆亭書訣』이 남아 있다. 계서溪西·경재敬齋·담상판각潭上板閣·차서헌此栖軒 등의 편액 글씨가 남아 있다.
추사체秋史體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후기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예서의 새로운 경지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편액글씨로는 매심사梅心舍 등이 남아 있다. 김정희의 문인이며 고종高宗의 아버지인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글씨와 문인화文人畵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근암近庵 등의 편액 글씨를 썼다.
이외에 매우 규범화된 글씨체로 이름이 높은 극암克菴 李基允(1891~1971)의 율수재聿修齋·동암東庵·여와餘窩 등이 있으며, 자유로운 필체를 구가하면서도 서법을 벗어나지 않은 동원東園 김희수金羲壽(1760~1848)의 도은구택陶隱舊宅·마곡서당磨谷書堂·초당草堂 등도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편액에는 함축된 2~5자 정도의 글자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세계,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부모에 대한 효孝, 조상에 대한 추모, 선현에 대한 존숭尊崇, 학문에 대한 열정과 신념, 유유자적하는 정신세계를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매우 함축된 인문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편액의 글씨는 모두가 단 1점만 남은 유일한 글씨로, 위작僞作이나 동일한 글씨는 전혀 없다. 또한 출처와 소유주가 분명하며, 훼손된 이후에는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닌 기록물이다. 제작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만약 편액이 훼손된다는 것은 편액 제작 당시의 대표적인 서체가 사라지며, 또한 편액에 담긴 시대정신도 함께 사라지는 결과가 된다.
한국은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농지가 공업단지로 바뀌면서 주변의 종가들도 사라지게 되었고, 거대한 댐의 건설로 한 마을이 전부 수몰되는 일도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종가 건물의 이전 내지는 파괴되면서 다시 새로운 건물을 수축하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지는 일도 생기게 되면서 편액은 급격히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건물에 매 달렸던 편액이 건물을 떠나 창고 속에서 썩어가고 때로는 도난을 당하면서 주변에서 사리지는 일이 발생하면서 편액의 소유주들은 편액을 영구 보존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에 한국국학진흥원에 보존을 의뢰하여 현재의 컬렉션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기탁된 편액을 보존하기 위해 항온항습의 수장고를 신설하고, 판가를 설치하여 이를 보존하고, 상설전시장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항상 공개하면서 편액이 지닌 기록유산적 가치를 홍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