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액의 출현은 중국에서 먼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에서는 이른바 진서팔법秦書八法의 6번째에 “署書”주1)
라 하여 편액에 사용하는 글씨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는 진나라 때에 편액체가 처음 등장했다는 의미보다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여 춘추전국 시대의 문자를 통일할 때 문수문자門首文字인 편액체를 통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이미 춘추전국시대(B.C.770~B.C.221)의 어느 시기에 편액이 등장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는 편액이 궁궐이나 국가기관 등에 한정하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편액의 사용이 민간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말기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때의 민간은 일반 백성과는 무관하며 귀족들 소유의 건축물로 한정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편액의 등장 시기를 정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고대국가가 성립한 삼국시대에 궁궐이나 국가기관, 사찰을 중심으로 편액의 사용이 시작되었을 것이며, 중국의 당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편액의 사용 범위가 귀족층의 건물까지 확대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는 없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편액으로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에 신라의 김생金生(711~?)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 <大雄寶殿>과 전라남도 강진의 만덕사에도 <萬德山白蓮寺>라는 글씨가 전해지고 있어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편액의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편액의 사용은 고려시대에 들어 보편화하기 시작하였다. 1123년(고려 인종 1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宋나라의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 왕성의 대문에 편액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는.....지금 왕성은 압록강 동남쪽 천여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중략)열두 외문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는데, 옛 기록에는 그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 다 알수 없다.주2)
당시에는 왕성만이 아니라 이미 민간에도 편액의 사용이 보편화된 듯하다.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의 양쪽과 재상, 부자들까지도 누관을 두어 점점 사치해졌다.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을 ‘박제博濟’라 하고 오른쪽을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주3)
이와 함께 백성의 거주 지역에도 편액을 설치하여 방坊의 성격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렸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광덕廣德’·‘흥선興善’·‘통상通商’·‘존신存信’·‘자양資養’·‘효의孝義’·‘행손行遜’이라 하였다.주4)
이를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는 왕궁과 사찰주5)은 물론 관부의 건물주6), 일반 민가에 이르기까지 이미 각 건물에 편액을 달아 건물의 성격을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편액의 사용이 보편화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주7)
이때 정도전은 새로 낙성한 경복궁의 중요 전각에 직접 전각의 명칭을 짓고 편액을 걸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중요 전각에만 편액을 걸어 두었을 뿐, 대궐의 출입문 등에는 편액을 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에 전교傳敎하기를, “외방外邦의 군사로 대궐 문에 입직入直하는 사람이 문 이름을 알지 못하여 해가 저물어도 지키는 곳에 이르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죄를 받게 되니, 이는 적당하지 못한일이다. 대궐 문에 예전에 편액이 없는 것은 각기 편액扁額을 걸도록 하라.”하였다.주8)
위 기사에 의하면 성종 6년(1475년) 당시까지도 궁궐의 각 문에는 편액이 없었다가 점차 지금처럼 모든 문호에 편액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를 전후로 궁궐을 중심으로 시작된 편액이 국가의 정책적 필요에 의해 민간에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성종대는 조선왕조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적인 교화정책이 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백성들의 교화를 장려하는 수단의 하나로 포상하는 뜻의 편액을 하사하기 시작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지금 받든 전교에, ‘윤대輪對하는 자가 말하기를, 절의節義는 사람의 큰 윤리倫理이므로 국가에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주군州郡에 반포하였는데 수령守令들이 버려두고 행하지 않으며, 또 효자孝子·절부節婦가 있으면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는 것이 참으로 성전盛典인데 또한 뜻을 쓰지 않고 다만 길 왼편에 나무를 가로질러 두니, 심히 포상褒賞의 뜻에 어긋납니다. 영해寧海에 절부節婦가 있어 매우 가난하고 또 늙었는데, 그 정문旌門 기둥이 썩었으므로 본관本官에서 절부더러 수리하여 만들라 하니 침해하고 독촉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여 이웃에 와서 구걸하여 수리하고자 하였으니, 소위 정표라는 것이 모두 이 지경입니다. 청컨대, 여러 고을로 하여금 중국의 예例에 따라 한 칸 시렁(架)를 짓고 편액을 달아서 포양褒揚하는 것을 보이게 하소서.주9)
16세기 이후 전국 각지에 선현을 추모하고 학덕을 기리기 위한 서원들이 건립되면서, 서원 건물에 서원의 명칭을 적은 편액을 게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賜額되면서, 국가에서 편액을 하사하여 선현을 숭모하는 뜻을 내세운 것도 편액의 사용을 보편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주10) 이때 서원에 사용된 편액은 선현을 숭모하는 내용과 함께 주로 지명이 많이 활용되었다.
예조가 아뢰기를,“전대前代의 서원書院 규정을 두루 고찰해 보니 모두 지명地名으로 이름을 지었고 별도의 뜻을 취하여 편액을 만든 것은 없었습니다. 송宋나라 때의 네 서원도 모두 지명으로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서 총애하고 아름답게 여겼으니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숭양서원崇陽書院·악록서원嶽麓書院·응천부서원應天府書院과 같은 것이며 그 나머지 태실서원太室書院·수양서원睢陽書院 등등 많습니다. 이번의 영천서원永川書院도 딴 명의名義를 세우려고 할 것이 없기에 영천의 별호인 임고臨皐·익양益陽을 서계합니다.” 하니 ‘임고’라는 이름을 내렸다주11)
사대부가에서는 서원보다 빠른 시기에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편액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1454~1488)이 졸卒하였다.(中略) 일찍이 작은 정자를 정원 안에 짓고 편액을 풍월정風月亭이라 하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아 놓고 날마다 그 사이에 있으면서 거의 다 섭렵하였다.주12)
* 전 이조판서 홍귀달洪貴達의 졸기卒記
(前略) 귀달(1438~1504)은 한미寒微한 신분에서 일어나 힘써 배워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성품이 평탄하고 너그러워 평생에 남을 거스르는 빛을 보인 적이 없으며, 남이 자기를 헐뜯어도 성내지 않으니 그의 아량에 감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문장文章은 곱고 굳세고 법도가 있었으며, 서사敍事를 더욱 잘하여 한때의 비명碑銘·묘지墓誌가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 정자에 편액하기를 허백虛白이라 하고 날마다 서사書史를 스스로 즐겼다.주13)
이처럼 15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건립된 건물에 편액을 게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현존하는 편액들은 19세기 이후의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조선 전기의 건축들이 이미 사라졌거나, 남아 있다하더라도 수차례의 중수, 중건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라 여기에 게시된 편액들도 건물과 함께 사라지거나, 중수, 중건 때 새로 편액을 새겨 매단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우선 편액은 건물의 외부에 설치되어 있어 비교적 훼손이 빨리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건물의 중수, 중건 때 낡은 편액 대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함께 전쟁으로 인한 건물의 소실, 산업화에 따른 개발 등으로 건물의 이전 또는 마을 자체를 타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경제적인 문제로 모든 건물을 이전 또는 복원하지 못한 채 편액만 보관하고 있기도 한다.
- 주1) 署書에 대한 해석으로 “편액匾額에 제명題銘하는 문자”라 설명하고 있다.
- 주2) 『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城邑」 <國城>. “高麗...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矣 其城周圍六十里 山形繚繞 雜以沙礫 隨其地形而築之 (중략) 外門十二 各有摽名 舊誌纔知其七 今盡得之”
- 주3) 『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城邑」 <樓觀>. “王城 昔無樓觀 自通使以來 觀光上國 得其規模 稍能(太上御名)治 初惟王城宮寺有之 今官道兩旁 與國相富人 稍稍僭侈 入宣義門 每數十家則建一樓 俯近興國寺 二樓相望 左曰博濟 右曰益平 王府之東 二樓臨衢 不見摽牓 簾幙華煥 聞皆王族游觀之所”
- 주4) 『宣和奉使高麗圖經』 권3, 「城邑」 <坊市>. “王城本無坊市 惟自廣化門至府及館 皆爲長廊以蔽民居 時於廊間 榜其坊門 曰永通 曰廣德 曰興善 曰通商 曰存信 曰資養 曰孝義 曰行遜”
- 주5) 고려시대 사찰의 편액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의 <無量壽殿> 편액이 있다.
- 주6) 관부에 매 단 편액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안동의 <安東雄府> 편액이 유일하다.
- 주7) 『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7일.“命判三司事鄭道傳 名新宮諸殿. 道傳撰名 幷書所撰之義以進”
- 주8) 『성종실록』 성종 6년 7월 24일. “傳于承政院曰 外方軍士入直闕門者 不識門名 日晏未至直所 因以受罪未便 闕門舊無額者 其各扁額”
- 주9) 『성종실록』 성종 8년 4월 22일. “禮曹啓 今承傳敎 ‘輪對者有言 節義, 人之大倫也 故國家頒三綱行實》於州郡 而守令廢閣不行, 且有孝子ㆍ節婦, 旌表門閭, 固爲盛典, 而亦不用意, 但橫木於路左, 甚違褒賞之意。 寧海有節婦, 甚貧且老, 其旌門柱腐敗, 本官乃令節婦修造, 不勝侵督, 來乞於隣欲修之, 凡所謂旌表者, 類皆如此。 乞令諸邑依中朝 作一間架懸扁額, 以示褒揚
- 주10) 국가가 포상의 의미로 편액을 하사하여 선현을 숭모하는 뜻을 보였다면, 반면에 편액을 파판破板해 버려 징벌懲罰의 뜻을 내보이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의 사건이지만 공주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배향된 윤선거尹宣擧, 윤증尹拯부자가 삭탈 관직되고 노강서원의 사액현판을 파판시켜 징벌적인 의미를 강조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주11) 『明宗實錄』 명종 9년 10월 10일. “禮曹啓曰 歷考前代書院之規 皆以地名爲號 未有別樣取意爲扁 宋朝四書院 皆以地名爲號 至賜扁榜以寵嘉之 如白鹿洞書院 崇陽書院嶽麓書院 應天府書院 其餘太室書院 睢陽書院之類 不一而足 今者永川書院 不必別立名義 就永川別號臨皐益陽書啓 賜號臨皐”
- 주12) 『성종실록』 성종 19년 12월 21일. “月山大君 婷卒 (中略) 嘗構小亭於園中 扁曰 ‘風月’ 聚經史子集, 日處其間 搜獵殆盡”
- 주13) 『燕山君日記』 연산군 10년 6월 16일. “(前略)貴達起自寒微 力學登第 位至宰相 性坦夷寬大 平生未嘗與人有忤色 聞人毁己 亦不爲怒人多服其量 爲文章麗而健 有法度 尤長於敍事 一時碑銘墓誌皆出其手 扁其亭曰 虛白 日以書史自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