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서체별 보기

관선재(觀善齋)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35.5×100.0 / 해서(楷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관선재(觀善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5.5×100.0
  • 건물명 관선재(觀善齋)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김종호(金宗鎬, 1901~1985)
  • 위치정보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  
r0330_1.jpg
관선재(觀善齋)

관선재(觀善齋)



관선재(觀善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대산종가 뒤편 대석산 절벽 아래에 있었던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강학한 대산서당(大山書堂) 오른쪽 협실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0㎝, 세로 35.5㎝이다. ‘관선(觀善)’은 친구들끼리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운다는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대학의 교육 방법은 좋지 않은 생각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예(豫)’라고 하고, 적절한 시기에 가르치는 것을 ‘시(時)’라 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르치는 것을 ‘손(孫)’이라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을 ‘마(摩)’라고 한다[大學之法 禁於未發之謂豫 當其可之謂時 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송나라 때 유학자인 주희(朱熹)는 ‘상관이선(相觀而善)’을 “다만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서 자기에게 유익함이 있음을 이르니, 예컨대 두 가지 물건을 가지고 서로 연마하여 각각 그 도움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朱子曰: 相觀而善 但謂觀人之能而於己有益 如以兩物相摩而各得其助也]”라고 풀이하였다.

글씨는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가 쓴 해서체이다.

빠른 붓놀림을 보여주는 ‘觀’ 자에서 친구의 장점을 하나라도 더 따라 배우려고 하는 바쁜 마음을 본다. ‘善’ 자에서 보이는 자유로운 결구는 친구의 장점을 흡수하여 몸에 익히려고 하는 실험정신을 보는 것 같다. ‘齋’ 자에서 다시 차분하게 이루어낸 단정한 결구는 이곳이 공부하는 신성한 공간임을 분명하게 해준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고려조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牧隱, 1328∼1396)의 15세손이다. 자가 경문(景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한산인(韓山人)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외손(外孫)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의 현손(玄孫)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인데, 모두 두터운 덕으로 후손들에게 넉넉한 복록을 드리워 주었다.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딸이다. 이상정은 1711년(숙종 37) 1월 29일에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蘇湖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 3세에 벌써 사서(四書)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이상정은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小學)』과 『맹자(孟子)』를 수업하였다. 이후 20세 5월에 이재의 상을 당하기까지 해마다 몇 달씩 금양정사(錦陽精舍)에 머물며 이재 밑에서 수학한다. 금양정사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후학들을 강학하고자 만년에 세운 정사(精舍)로, 지금은 그 터만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있다. 이상정은 19세에 금양정사에서 추촌(秋村) 김익한(金翼漢, 1702~1785), 소산(小山) 권정택(權正宅, 1706~1765),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 범암(凡巖) 김익명(金翼溟, 1708~1775) 등과 『근사록(近思錄)』을 공부하였다. 이때 “금문(錦門)의 제공들이 여러 번 모여서 한 달 남짓 공부했는데, 모두 이상정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리학에 관한 학문적 역량이 일찍부터 탁월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정은 21세에 『심경(心經)』을, 22세에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어, 젊은 시절부터 이황이 밟은 자취를 따라 주희의 사상을 공부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글을 읽으면 무엇이든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율려(律呂)와 역법(曆法)과 산수(算數) 등에 모두 통달하였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과 심의(深衣) 및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검토하는 일도 없이 곧장 그 손길을 따라서 만들어서 항상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았다. 이때 「동지오잠(冬至五箴)」을 지었는데, 그중에 ‘궁리(窮理)’와 ‘주경(主敬)’은 곧 사문(師門)의 지취(旨趣)를 발양(發揚)한 것이며, 거기에 다시 ‘근독(謹獨)’과 ‘독지(篤志)’와 ‘일신(日新)’을 보태어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그 뒤 밀암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의지할 곳을 잃어버려 마음 아파하였다. 그럴수록 더욱더 힘써서 스스로 노력하여 이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은?)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 하고는 「병명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 여덟 가지였다. 그리하여 모든 잡된 글들을 치워 버리고 몸과 마음의 일상적인 생활을 반성하여 성찰하기를 도탑게 하였다.

1735년(영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방목(榜目)을 전하는 자가 밤중에 여관에 도착하여 급히 불을 찾았다. 그러자 이상정이 말하기를,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요” 하고는 그대로 여전히 잠만 잤다. 그 뒤 대과에 급제하여 창명(唱名)이 끝난 다음 선영(先塋)에 전성(展省)하러 떠나고자 하였는데, 누가 말하기를, “규례로 보아 응당 기거주(起居注) 사관(史官)을 섭행(攝行)하게 되어 있으니, 좀 기다려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상정이 말하기를, “아무리 가관(假官)이라고 한들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해 겨울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지고 역대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대하여 상고하고 연구하였다.

1736년(영조 12)에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주자(朱子)처럼 상지(上智)의 자질을 가진 분도 언제나 이와 같이 선생과 장자(長者)들의 문하(門下)를 찾아다녔으며, 주고받은 논변들이 한두 분의 친구들 정도에서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같은 자들이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밖에 나가면 서로 강론하는 데서 도움을 받고 집에 들어오면 혼자서 이를 탐색하고 연구하였으니, 크게 깊이 생각하고 실질적인 체험을 통해서 궁구하였던 것이다.

1739년(영조 15)에 정고(呈告)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단양의 구담(龜潭), 도담(島潭), 삼선암(三仙岩) 등의 여러 명승지를 들러서 울적한 기분을 확 풀었다. 그런데 이상정의 종모형(從母兄 이종형)이 이상정이 벼슬이 바뀌어서 돌아온 줄을 모르고 우관(郵館)을 들렀다. 그랬더니 그 후임자가 말하기를, “전임자가 이처럼 재물을 봉하여 남겨서 후임자가 쓰도록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를 혼자서 쓰겠는가” 하고서 후하게 노자를 주어서 보냈다.

이상정은 평소 벼슬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 1751년(영조 27)에 예조낭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753년(영조 29)에 연일현감(延日縣監)에 제수되었는데 1년이 못 되어서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1755년(영조 31)에 옥사(獄事)에 연좌되어 파직되어 돌아왔다. 1758년(영조 34)에는 상이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며, 1762년(영조 38)에는 다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이상정은 조령(鳥嶺) 밑에 이르러서 병을 이유로 정장(呈狀)하고는, “갈매기는 사람의 일에 관심이 없고, 일만 리 물결 위를 자유로이 노니누나[白鷗不關人間事 萬里波長自在遊]”라는 시를 남겼다.

그 뒤 1771년(영조 47)에 강령현감(康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80년(정조 4)에는 병조낭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임금이 이상정에게 관심을 가지고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이상정을 천거하였으므로 대산을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시켜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 이상정이 상소하여 이를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옮기었으며, 이듬해인 1781년(정조 5)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전보되었다. 정조는 기필코 이상정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대신(大臣)의 논계(論啓)를 따라서 이상정을 무겁게 추고(推考)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충주(忠州)에 이르러서 글을 올리고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다시 풍기(豐基)까지 가서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의 덕(德)에 대해서 진달하는 9가지 소를 올렸는데, 뜻을 세우고[立志], 이치를 밝히고[明理], 공경을 생활화하고[居敬],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고[體天],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학문을 일으키고[興學], 사람을 잘 쓰고[用人],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검박을 숭상하는 것[尙儉]이었다.

이상정은 1781년(정조 5) 10월에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다. 이때 이상정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 문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으며, 이상정은 이때에도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고종(考終) 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상정은 12월 9일에 운명하여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위(配位) 장수황씨(長水黃氏)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후손으로 처사 황혼(黃混)의 딸이다. 점잖고 정숙(貞淑)하였는데, 이상정이 항상 내조(內助)의 공이 많다고 일컬었다. 아들 완(埦)은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완의 맏아들 병운(秉運)은 현감을 지냈고, 둘째 병진(秉進)과 셋째 병원(秉遠)도 현감을 지냈다. 맏딸과 둘째 딸은 모두 전주류씨 집안인 류회문(柳晦文)과 류노문(柳魯文)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상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일컬어졌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대산 이상정의 시세계 연구」(안동대 석사학위논문)
  • 이상정(李象靖),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광정(李光靖),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