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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풍정(晩楓亭)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61.5×136.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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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풍정(晩楓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1.5×136.0
  • 건물명 만풍정(晩楓亭)
  • 공간명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 서예가
  • 위치정보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1길 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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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풍정(晩楓亭)

만풍정(晩楓亭)



만풍정(晩楓亭)은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동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만풍’은 류광선(柳光先, 1512~1579)의 호로, 두목(杜牧)의 「산행(山行)」 시에서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 감상하노니, 붉게 물든 단풍 2월의 꽃보다 붉네.[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라고 한 데서 취한 듯하다. 만풍정은 1960년대에 건립되었다가 2012년에 중건했으며, 울산 입향조 만풍정 류광선 이하 여러 조상을 기리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먹을 듬뿍 먹은 붓이 반듯한 듯 경직되는가 하면 어느새 틀어져 긴장을 풀어주고, 느리게 가면서 지루할 법한 곳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나이 든 선비의 단아한 학춤을 보는 것 같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문화류씨 서산공파 참판공종중文化柳氏 瑞山公派 參判公宗中 소개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동은 북서쪽은 효문동, 북동쪽은 어물동, 남동쪽은 염포동, 남서쪽은 명촌동과 접한다. 서쪽으로 명촌천이 흘러 남동단의 태화강과 만나 울산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부채들건, 은산, 왜시들, 오치골, 불선골, 성지목골, 큰대밭골, 대밭골, 아굴래골, 비상골, 새미등, 심청골못 등이 있다. 양정동은 옛날부터 버드나무가 많고 만풍정(晩楓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양정(楊亭)’의 ‘양’은 뜻이 버들로 ‘버든’의 음차로 볼 수 있다. 버든은 높고 평평하고 나무가 없이 풀만 자란 땅을 말하는 것으로 뻐든, 뻐덩, 버덩, 펀덩이라고도 한다. 울산 지역에는 버든에서 온 지명이 많다. 양정동은 1765년(영조 41)에 오정리와 양정리로 나누어져 있었고, 1911년에는 양정, 양동, 치진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들 3개 마을에 율동의 일부를 합한 후 양정리로 하고, 하부면과 내상면을 통합한 울산군 하상면의 관할에 두었다. 1962년 6월 울산시에 편입되어 병영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이후 여러 번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1997년 7월 울산광역시 출범과 함께 신설된 북구에 편입되어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동이 되었다. 지금은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 마을의 대부분을 잠식하면서 개발이 극심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양정동의 문화류씨(文化柳氏)는 고려 개국공신 류차달(柳車達)의 후손으로, 조선시대 단종 때의 충신이었던 감찰 류자미(柳自湄)를 거쳐, 명종 때 형조참판을 지낸 만풍정(晩楓亭) 류광선(柳光先, 1512~1579)이 양정동에 입향하면서 형성된 성씨이다. 류광선은 1547년(명종 2) 울산 지역에 유배되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울산시 중구 반구동에 정착했다가 1600년(선조 33) 초에 북구 양정동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이후 자신을 따라 울산으로 내려온 둘째 아들 송호(松壕) 류정(柳汀, 1537~1597)도 양정동에 정착하였다. 이로써 후손들이 대대로 양정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문화류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류광선의 조부인 류자미(柳自湄)는 자가 원지(元之), 호가 서산(西山)이며, 아버지는 기주현감을 지낸 류함(柳浛)이다.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을 지냈다. 1455년(단종 3)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절의를 지켜 한평생 절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는데, 작품으로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 1점이 전한다.
류광선은 자가 국빈(國賓), 호가 만풍정(晩楓亭),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아버지는 류진(柳軫),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감찰을 지낸 김웅(金熊)의 딸이다. 중부 류지(柳輊)에게 학문을 배워 수리(數理)에 관한 책에서부터 육도삼략(六韜三略)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다. 1533년(중종 28)에 삼화현령에 제수되었고, 1536년(중종 31)에 도총부도사, 1538년(중종 33)에 한성부판관, 1541년(중종 36)에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에 가선대부에 올라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1)에 직언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울산에 유배되었는데, 석방된 뒤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설 뜻이 없어 그대로 울산에 은둔하였다. 1576년(선조 9)에 고라[지금의 포항시 죽장면 일대로 추정]에 별장을 경영하여 묘우를 세웠다.
류정은 1537년(중종 32) 류광선의 둘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546년(명종 1) 아버지 류광선이 울산 반구정으로 유배될 때 따라 내려왔는데, 아버지에게 가학을 전수받으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1587년(선조 20) 무렵 아버지의 명으로 경주 서면[지금의 산내면] 심원에 별장을 경영하여 송호정사(松壕精舍)를 지었다. 그러나 한적한 은거 생활도 잠시 왜란의 조짐 때문에 전쟁 준비에 몰두하였다. 1590년(선조 23) 12월 10일에 고라 별장으로 이거했는데, 변란의 조짐이 보이자 그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깊은 산중으로 옮긴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대구 팔공산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이후 경주 부윤 윤인함(尹仁涵)으로부터 영병대장의 직책을 받은 뒤 1597년(선조 30) 9월 22일 왜적과의 전투 중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경주 동해 출신으로 류정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던 박인국(朴仁國)은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공은 본래 선비로서 의리를 강론했기에 公本儒生講義理
나라만 생각했지 몸은 아랑곳하지 않았네. 只知有國不知身
가련하구나, 오늘의 팔공산 싸움이여 可憐今日公山役
하늘은 어찌하여 사람을 돌보지 않는고. 天意胡爲不眷人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3등에 녹훈되었고, 1835년(헌종 1) 양산 산막동 칠현사에 봉향되었으며, 1947년 울산시 청량면 율리 영취산에 단비(壇碑)를 세웠다. 저서로는 『송호역의변론(松壕易義卞論)』 6권과 임란일기가 실려 있는 『송호유집(松壕遺集)』이 있는데, 『송호역의변론』은 난리 중에 잃어버려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 안정, 「‘송호유집(松壕遺集)’ 해제」, 『(국역) 송호유집』, 한국국학진흥원, 2015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2』, 한국국학진흥원, 2016
    울산역사문화대전:북구
  • (http://ulsan.grandculture.net/Main/Local?local=ulsan&gcode=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