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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晩翠軒)

영양남씨 영해 난고종택(英陽南氏 寧海 蘭皐宗宅0

61.3×121.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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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취헌(晩翠軒)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1.3×121.5
  • 건물명 만취헌(晩翠軒)
  • 공간명 영양남씨 영해 난고종택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양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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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헌(晩翠軒)

만취헌(晩翠軒)

만취헌(晩翠軒)은 남노명(南老明, 1642~1721)이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영해 난고종택(蘭皐宗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21.5㎝, 세로 61.3㎝이다. ‘만취(晩翠)’는 정자 앞에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눈과 서리에도 푸름을 잊지 않음을 보고 명명한 것이다. 이는 송나라 재상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이 조카 범고(范杲)가 품계를 올려주기를 청하자 시를 지어 깨우쳐주었는데, 그 시에 “활짝 핀 정원의 꽃은 일찍 피지만 먼저 시들고, 더디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여 변함없이 푸르네[灼灼園中花 早發還先萎 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이 시는 『소학』 「가언(嘉言)」에도 수록되어 있다.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지은 「만취헌기(晩翠軒記)」에 만취헌 건립과 중건 그리고 남노명의 사람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아림(娥林 거창의 별칭) 공은 성품이 고결하고 맑아서 세상과는 우열을 다투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표연(飄然)히 해산(海山)의 남쪽으로 물러나 구봉산(九峰山) 아래에 집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를 ‘만취(晩翠)’라 하였으니 그것은 노공(魯公)의 시어(詩語)에서 따온 말이다.
공은 이때부터 야인 복장을 하고선 날마다 그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며 노년을 보냈다. 100여 년 뒤에 집이 매우 낡아서 공의 현손(玄孫) 두양(斗陽)이 옛터를 개척하여 집은 두 배로 넓히고 뜰은 그윽하게 하고 담장까지 둘렀다. 이것은 참으로 선조의 가업을 잘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만취’라는 당호를 걸려고 나에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내가 생각해보니 공께서 정자에 이름 붙인 뜻을 대략 알 수 있었다. 무릇 강해(江海)에서 생산되는 식물은 사랑할 만한 것이 많다. 기다란 대나무와 수많은 매화꽃은 바람 불고 달뜨는 저녁이면 현란하게 꽃을 피우지만, 공은 이것을 취하지 않았다. 또한 공께서 일찍이 소나무와 잣나무를 직접 심은 적은 없으나, 뜻을 부치고 흥을 의탁한 것은 곧 남산(南山)의 소나무와 북산(北山)의 잣나무에 있었으니 무엇 때문인가? 어찌 저 연약한 대나무와 수척한 매화로 하지 않은 것일까. 대나무와 매화는 눈에 짓눌리고 바람에 꺾이어 이따금 압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겨울을 겪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눈과 서리를 맞을수록 더욱 굳센 것은 유독 송백(松栢)이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공의 뜻이 여기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나무는 수령이 오래된 것은 100년 된 것도 있고 200년이 된 것도 있으며, 큰 것은 대들보가 되고 작은 것은 서까래도 되니 공의 마음은 이것을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행체이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글씨가 견실함을 갖추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튼튼한 획으로 시작한 ‘日(일)’ 자에 속도를 더한 붓이 경쾌한 발자취를 남기며 조형한 ‘晩(만)’ 자가 저물어 감을 아쉬워하는 것 같아 처연하다. 묵직하게 ‘羽(우)’ 자로 시작한 붓이 계속되어 지나치게 무거울 법도 하지만 ‘卒(졸)’ 자의 세로획이 시원하게 내려오며 중심을 확실하게 잡으며 분위기를 바꿔준다. ‘車(차)’ 자를 우상향하는 획을 점철하며 높게 올리더니 ‘干(간)’ 자를 짱짱하게 붙여 쓴 ‘軒(헌)’ 자가 편액의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양남씨 영해 난고종택 소개

남노명(南老明, 1642~1721)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태서(台瑞)·수서(壽瑞), 호는 만취헌(晩翠軒)이다. 증조는 난고(蘭臯) 남경훈(南慶薰, 1572~1612)이고, 조부는 안분당(安分堂) 남길(南佶, 1594~1654)이며, 부친은 남상주(南尙周)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684년(숙종 1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내직으로는 병조·예조좌랑을 거쳐 기사관을 지냈다. 외직으로 거창현감을 지낼 때는 기근이 심하여 농민들을 구휼하는 데 온갖 힘을 다하자 관내(管內)의 농민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노년에는 향리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면서 여생을 마쳤다.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는 1789년(정조 13) 편찬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영해부 남면에 속한 지역으로 원고(元皐)라 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관제 개편으로 영해부가 영해군이 되었을 당시에 묘곡면의 지역으로 원구(元邱)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 하여 뚜들로 불렀으며, 이를 또한 원두들 또는 원구, 원파라 하였다. 옥금이란 지명에 대해서는 『호구총수』에 오금(梧琴)으로 나오나 『단양부지』에는 옥금상하리(玉今上下里)로 나온다. 이후 원구리는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상동, 원중동, 원하동, 옥금동을 병합하여 원구동이라 하고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 원고동을 원구1동, 옥금을 원구2동으로 분동했으며 1988년에 동이 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난고종가(蘭皐宗家)는 조선 중기 성균진사(成均進士)이자 임진왜란 때 영해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난고 남경훈의 종가이다. 그 아들인 안분당 남길이 1624년(인조 2)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가는 모두 7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대문채에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정침과 대청인 만취헌(晩翠軒)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그 우측으로는 담장을 두른 사당과 별묘(別廟) 그리고 난고정(蘭皐亭) 및 주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온 「난고종가문서(蘭皐宗家文書)」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되고 있다.
이처럼 난고종가는 건립 당시의 생활상과 건축에 대한 의식이 잘 보존 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가의 시대 변천 과정을 400여 년간 기록해온 문서가 잘 보존된 유서 깊은 곳이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조술도(趙述道), 「만취헌기(晩翠軒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