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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향정(晩香亭)

경주이씨 덕동 명실문중慶州李氏 德洞 明室門中

45.2×106.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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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향정(晩香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5.2×106.0
  • 건물명 만향정(晩香亭)
  • 공간명 경주이씨 덕동 명실문중慶州李氏 德洞 明室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경주시 덕동길 4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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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향정(晩香亭)

만향정(晩香亭)



만향정(晩香亭)은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 명실[明谷]마을에 건립한 정자의 편액이다. ‘만향’은 명실마을 입향조인 이만방(李晩芳, 1672~1752)의 호로, 송나라 시인 한기(韓琦)의 「구일수각(九日水閣)」 시에 “오래된 정원의 담담한 가을빛 부끄러워 말고, 우선 늦가을 찬 국화의 향기를 보시오.[不羞老圃秋容淡 且看寒花晩節香]”라고 한 데서 취한 듯하다. 여기서 국화는 비록 늦게 피지만 향기는 더욱 뛰어나듯, 자신은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절개는 더욱 견고하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만방은 오래 천수를 누려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만(晩)’ 자의 넉넉함이 보이는 풍모는 달관한 이의 여유가 느껴진다. 가벼운 삐침으로 시작하여 단정하게 마무리한 ‘향(香)’ 자는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지 않는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듯하다. ‘정(亭)’ 자의 소박한 분위기는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는 국화와 잘 어울린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경주이씨 덕동 명실문중慶州李氏 德洞 明室門中 소개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은 동쪽으로는 양북면과 포항의 장기면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월성동, 남쪽으로는 불국동, 북쪽으로는 천북면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만향정(晩香亭)이 있는 덕동은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길에서 암곡동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 있는데, 1977년 덕동호가 준공되면서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고 현재 덕동호의 동쪽 가장자리 산 중턱에 20여 가구만 살고 있다. 덕동호가 약간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기울여 길게 남북으로 활처럼 동쪽의 산들을 감싸 안고 그 가장자리인 동쪽의 기슭에 마을이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해발 200여 미터나 되는 이곳은 동쪽은 600여 미터가 넘는 가파른 황용산이 남북으로 길게 암곡까지 뻗어 있다. 이 지류인 괘정산이 500여 미터로 깎아 세운 듯이 북쪽에 이어서 암곡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산 너머의 황용동과 산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서쪽으로는 호수 건너 약 260m의 괘정산을 두고 신평동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은 길게 호수가 끝나는 부분에서 촛대처럼 세운 듯한 만호봉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 조선시대 중엽까지는 덕동과 암곡이 한마을이었는데 그 후에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군면 폐합에 따라 내동면 덕동리라 부르다가 1955년 9월 1일 내동면 전성이 경주시로 편입됨에 따라 경주시 덕동으로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법정동인 황용동과 더불어 덕황동으로 통합되어 운영되었다. 1977년 5월 31일 마을 어귀의 신평동과의 경계 지점에 남북으로 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이 수몰되고 현재의 가구만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1986년 5월 1일 인근의 천군동, 암곡동과 더불어 보덕동으로 통폐합되어 운영되고 있다.
경주시 덕동 경주이씨(慶州李氏) 명실문중은 고려 말의 뛰어나 유학자이자 위대한 문장가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후손이다. 익재 이제현은 자가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초명은 지공(之公),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면서 한족 출신 문인들과 자주 접촉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고려로 돌아와 정동행성(征東行省) 설치를 반대하고, 충선왕의 방환을 추진하는 등 국내외의 크고 작은 일을 맡았다. 1351년(충정왕 3)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로 호종한 공으로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경주의 구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 조선이 건국된 이후 세조 때 한성판윤을 지낸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가 경주로 낙향하여 불국사 남쪽에 터전을 잡았다. 그가 만향(晩香) 이만방(李晩芳, 1672~1752)의 8대 조부이다. 이후 이만방의 조부 때부터 연일 문충에 터전을 잡았는데 이만방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훗날 이만방이 아버지의 고향인 경주 명곡으로 다시 돌아가 터전을 잡은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경주이씨 명실문중이라는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만방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경주 유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또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지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82세까지 천수를 누려 우로전(優老典)으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강릉참봉에 제수되었다. 한편 1975년 덕동댐 건설로 인해 덕동마을이 수몰되면서 만향정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만향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의 아름다운 정자이다.

    참고문헌
    • 『경주 유교문화유적』, 경주향교, 2010
    • 경주시 마을소개(http://www.gyeongju.go.kr/open_content/ko/page.do?mnu_uid=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