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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서당(大山書堂)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48.0×158.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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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대산서당(大山書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0×158.5
  • 건물명 대산서당(大山書堂)
  • 공간명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남후면 암산1길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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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서당(大山書堂)

대산서당(大山書堂)



대산서당(大山書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37번지 대산종가 뒤편 대석산 절벽 아래에 있었던 서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한산이씨 대산종가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58.5㎝, 세로 48㎝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1738년(영조14)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한산이씨 문중의 부로(父老)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호리 북쪽에 있는 대석산(大夕山 일명 일개산一介山) 아래에다 작은 서재(書齋)를 지어 놓고 이상정으로 하여금 교육을 주관하게 했다. 이에 이상정은 부모님을 위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하고 시선(視饍)하는 시간 이외에는 매일 이곳에 와서 강학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그 집의 남쪽을 ‘만완(晩玩)’, 북쪽을 ‘관선(觀善)’, 그 헌함(軒檻)을 ‘영락(永樂)’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이를 모두 합쳐서 편액하기를 ‘대산서당(大山書堂)’이라고 하였다. 이때 지은 오언율시 한 수가 있어 소개하는 바이다.

簷瀉泠泠雨 처마에는 후둑후둑 비 내리고
窓含遠遠風 창은 멀리서 부는 바람을 맞네
全身老樹濕 늙은 나무는 온몸이 흠뻑 젖고
一水小塘空 메마른 연못에도 물이 고였네
山影來虛外 허공 밖의 산 그림자 드리우고
荷香得暗中 연꽃 향기 은은하게 풍겨오네
名途兩脚倦 벼슬길에 두 다리가 지쳤으니
此樂擬君同 이 즐거움 그대들과 함께하리

이상정은 관동(冠童) 두서너 명을 데리고 온통 책 속에 묻혀서 한 칸 방 안에서 우주를 부앙(俯仰)하면서 더욱 정밀하게 이치를 연구하고 체험하였다. 비록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기도 하였지만, 이런 것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더러 틈이 나면 기분에 따라 이곳저곳 배회하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불러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고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완미(玩味)하여 즐김이 깊고 투철하였다. 이에 원근의 학자들 가운데 또한 이 소문을 듣고 책을 싸 들고 찾아오는 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당시에 걸었던 편액은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글씨는 석당(石堂) 김종호(金宗鎬, 1901~1985)가 경자년(1960)에 쓴 것이다.

‘大山’이라는 기세 넘치는 두 글자가 전체 분위기를 압도한다. ‘書堂’이라는 두 글자가 뒤따라오는데 다소 기세를 누르고 차분하게 써서 공부하는 공간에 경건함을 부여한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한산이씨 대산종가(韓山李氏 大山宗家) 소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고려조의 대학자인 목은(牧隱) 이색(牧隱, 1328∼1396)의 15세손이다. 자가 경문(景文)이며 성은 이씨(李氏)인데 한산인(韓山人)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외손(外孫)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의 현손(玄孫)이다. 증조는 이효제(李孝濟)이고, 조부는 이석관(李碩觀)이며,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고, 어머니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밀암(密菴) 이재(李栽, 1657~1730)의 딸이다. 이상정은 1711년(숙종 37) 1월 29일에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蘇湖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7세에『십구사략(十九史略)』을 배웠는데 지칠 줄 모르고 글을 읽었으며, 12, 3세에 벌써 사서(四書)를 다 읽었다. 『연보』에 의하면, 이상정은 14세 때 외조부인 밀암 이재 밑에서 『소학(小學)』과 『맹자(孟子)』를 수업하였다. 이후 20세 5월에 이재의 상을 당하기까지 해마다 몇 달씩 금양정사(錦陽精舍)에 머물며 이재 밑에서 수학한다. 금양정사는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이 후학들을 강학하고자 만년에 세운 정사(精舍)로, 지금은 그 터만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있다. 이상정은 19세에 금양정사에서 추촌(秋村) 김익한(金翼漢, 1702~1785), 소산(小山) 권정택(權正宅, 1706~1765),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 범암(凡巖) 김익명(金翼溟, 1708~1775) 등과 『근사록(近思錄)』을 공부하였다. 이때 “금문(錦門)의 제공들이 여러 번 모여서 한 달 남짓 공부했는데, 모두 이상정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리학에 관한 학문적 역량이 일찍부터 탁월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정은 21세에 『심경(心經)』을, 22세에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읽어, 젊은 시절부터 이황이 밟은 자취를 따라 주희의 사상을 공부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글을 읽으면 무엇이든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율려(律呂)와 역법(曆法)과 산수(算數) 등에 모두 통달하였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과 심의(深衣) 및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검토하는 일도 없이 곧장 그 손길을 따라서 만들어 내어서 항상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았다. 이때 「동지오잠(冬至五箴)」을 지었는데, 그중에 ‘궁리(窮理)’와 ‘주경(主敬)’은 곧 사문(師門)의 지취(旨趣)를 발양(發揚)한 것이며, 거기에 다시 ‘근독(謹獨)’과 ‘독지(篤志)’와 ‘일신(日新)’을 보태어서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그 뒤 밀암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의지할 곳을 잃어버려 마음 아파하였다. 그럴수록 더욱더 힘써서 스스로 노력하여 이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홀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문장은 한낱 조그마한 재주일 뿐이니, 기수(器數) 예기(禮器)와 예수(禮數) 등의(은?) 의문(儀文)의 말단이요 도(道)의 지극한 바가 아니다” 하고는 「병명팔첩(屛銘八帖)」을 지었는데, 독서(讀書), 독지(篤志), 신사(愼思), 사고(師古), 근독(謹獨), 성신(省身), 일신(日新), 역행(力行) 여덟 가지였다. 그리하여 모든 잡된 글들을 치워 버리고 몸과 마음의 일상적인 생활을 반성하여 성찰하기를 도탑게 하였다.

1735년(영조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방목(榜目)을 전하는 자가 밤중에 여관(旅館)에 도착하여 급히 불을 찾았다. 그러자 이상정이 말하기를,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보아도 늦지 않을 것이요” 하고는 그대로 여전히 잠만 잤다. 그 뒤 대과에 급제하여 창명(唱名)이 끝난 다음 선영(先塋)에 전성(展省)하러 떠나고자 하였는데, 누가 말하기를, “규례로 보아 응당 기거주(起居注) 사관(史官)을 섭행(攝行)하게 되어 있으니, 좀 기다려 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상정이 말하기를, “아무리 가관(假官)이라고 한들 어떻게 미래의 일을 미리 기대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해 겨울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지고 역대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에 대하여 상고하고 연구하였다.

이상정은 1781년(정조 5) 10월에 병이 들어서 자리에 누웠다. 이때 이상정에게 글을 배우러 온 선비들로 인해 문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으며, 이상정은 이때에도 여전히 이들에 대한 응대를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다. 고종(考終) 시의 상황은 김종섭(金宗燮)과 류범휴(柳範休)가 기록한 『고종일기(考終日記)』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상정은 12월 9일에 운명하여 이듬해 3월 을축일에 안동부 북쪽에 있는 학가산의 사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이상정은 18세기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상정은 퇴계(退溪) 이황(李滉)→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菴) 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집대성하여 소퇴계(小退溪)로 일컬어졌다. 이상정에 의해 집대성된 퇴계학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지는 계통과, 성리학적 사유체계에 있어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 「대산 이상정의 시세계 연구」(안동대 석사학위논문)
  • 이상정(李象靖),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
  • 이광정(李光靖), 『소산선생문집(小山先生文集)』
  • 안동문화원, 『안동오면 뵈줄게』
  • 안동문화원,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지명유래』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상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