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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서원(德峯書院)

순천박씨 판윤공파종중(順天朴氏 判尹公派宗中0

57.6×186.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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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덕봉서원(德峯書院)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7.6×186.0
  • 건물명 덕봉서원(德峯書院)
  • 공간명 순천박씨 판윤공파종중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성주군 수륜면 윤동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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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봉서원(德峯書院)

덕봉서원(德峯書院)

덕봉서원(德峯書院)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에 박가권(朴可權, ?~1426)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덕봉서원 편액이다. 이 편액은 순천박씨(順天朴氏) 판윤공파종중(判尹公派宗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86㎝, 세로 57.6㎝이다. 덕봉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지금은 강당인 성인당(成仁堂) 건물만 남아 있다. 서원의 명칭은 일반적으로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처럼 서원이 건립된 지명을 따르거나, 서산서원(西山書院)처럼 배향자의 주된 특징을 기준으로 정하게 된다. 덕봉서원이 위치한 곳의 지명은 수륜동(修倫洞)이다. 그러므로 덕봉서원은 지명을 기준으로 정한 것은 아니고, 배향자인 박가권의 특징점을 기준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박가권은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에 대한 충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이곳 성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므로 서원을 건립할 당시 박가권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의 명칭을 ‘덕봉(德峯)’으로 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강당인 성인당의 ‘성인(成仁)’은 『논어』 「위령공(衛靈公)」의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해서 인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루는 일이 있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인데, 여기서도 박가권의 행동을 성인에 비유하여 강당의 명칭을 정한 것이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운 넘치는 글씨가 편액 전체를 가득 채우면서 덤빌 듯한 기세로 다가오는 첫인상이 당혹스럽다. 그러나 우거진 밀림을 거느린 산 같은 ‘峯(봉)’ 자가 점잖게 앉아있는 ‘德(덕)’ 자를 쿡 찌르며 슬쩍 도발하는데도 흠칫 놀랄 뿐 꾸짖지 않고, ‘書(서)’ 자를 밀치고 들어가는데 살짝 자리를 내어주는 듯한 모양이 미소 짓게 한다. ‘院(원)’ 자의 꼿꼿함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잡아 경건함으로 유도한다. 넘어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바로 서고 무질서하게 다가오지만 그 안에서 질서를 잡아감이 빈틈없는 구성을 보여주어 놀랍다. 무기교의 기교로 철저한 계산에 의한 구성으로 보인다. 모든 글자가 서로 간섭하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도 이렇듯 자유롭고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순천박씨 판윤공파종중 소개

순천박씨(順天朴氏)는 원래 고려 개국공신 박영규(朴英規)의 후손이다. 박천상(朴天祥)은 공민왕조에 무과로 관직에 나아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를 거쳐 도첨의 시중(都僉議侍中)에 올랐으며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인으로 시를 잘 지어 이름이 알려진 이조년(李兆年)의 손녀를 첫 부인으로 얻고 다시 당대의 최고 권세가의 한 사람인 권겸(權謙)의 외손녀를 둘째 부인으로 얻을 정도로 이름이 높았다. 공양왕 때에 이씨왕조(李氏王朝)를 건국하려는 정치 세력에 의해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사건이 일어나 고려조의 충신들이 대거 숙청될 때 이에 연루되어 아들 박가흥(朴可興)과 함께 투옥되기도 하였다.
박가흥(朴可興)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검교의정부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공양왕 때에는 이초의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와 함께 투옥 유배되었으나 정몽주의 강력한 구명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박가권(朴可權)은 박가흥의 아우로 약관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의정부 요직을 두루 거쳐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냈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견지하며 가야산에 은거하였다.
박가권의 아들 박유성(朴柳星)은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한편 박가권의 6대손인 박이장(朴而章, 1540~1622)은 자가 숙필(叔弼), 호가 용담(龍潭) 또는 도천(道川)이다. 1573년(선조 6)에 생원·진사 두 시험에 입격하고, 1586년에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에 대사간, 병조참판,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삭직되어 성주(星州)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장에 능했으며 특히 시에 이름이 있었다.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정종로(鄭宗魯), 「고려판윤박공묘갈명(高麗判尹朴公墓碑銘)」, 『입재집 별집(立齋集別集)』 권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