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구서원(丹邱書院)
단구서원(丹邱書院)은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분토리에 창건한 서원 편액이다. 단구서원은 1856년(철종 7) 봄에 사림(士林)의 주도로 신적도(申適道, 1574~1663), 신달도(申達道, 1567~1631), 신열도(申悅道, 1589~1659) 삼 형제의 창의(倡義) 정신을 기리고, 신적도의 아들 신채(申埰, 1610~1672)의 유학 사상을 계승하기 위해 1858년(철종 7)에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3년 만에 철폐되었다. 1873년(고종 10) 흔적만 남은 곳에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향사를 지내다가 1989년에 신기훈(申基勳)의 주도로 묘우를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 편액은 아주신씨(鵝州申氏) 회당공파종중(悔堂公派宗中)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74㎝, 세로 53㎝이다. ‘단구(丹邱)’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상덕사(尙德祠),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동재(東齋)인 거인재(居仁齋), 서재(西齋)인 적의재(迪義齋), 주소(廚所) 등으로 되어 있다. 사당인 상덕사는 도산서원 상덕사와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숭현사(崇賢祠)로 바뀌었다가 최근 복원하면서 예전의 명칭 그대로 상덕사라 하였다. 상덕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초익공(初翼工) 맞배지붕 건물이다. 거인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거인재중건기(居仁齋重建記)」와 「단구서원상량문(丹邱書院上樑文)」이 표구된 액자가 걸려 있다. 적의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거인재와 달리 편액되어 있지 않다. 강당인 명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이익공(二翼工) 팔작지붕 건물이다.
분토리는 주위에는 구봉(九峰)이라고 불리는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서 이를 찾아온 어떤 지관(地官)이 이 구봉 중 봉두산(鳳頭山)이 봉의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어 길지라고 기뻐하였으나 앞산 갈모봉이 사혈(蛇穴)임을 알고 분함을 토해냈다는 뜻으로 분토(憤吐)라 하여 그대로 지명으로 전해 왔다. 그 후세에 마을 이름에 ‘분할 분(憤)’은 좋지 않은 뜻이라 하여 비옥한 흙을 토해내는 동네란 뜻으로 ‘분토(粉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360년 전에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바 있는 신열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그 후에 신석우(申錫祐)가 단구서당을 지어 유생을 가르침에 단구라 칭하다가 1879년(고종 16)에 와서 고종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자 마을의 안 고개의 이름을 따서 엄고개 또는 엄현(奄峴)이라 불렀다. 인근에 새로 생긴 또 하나의 자연 마을은 신기(新基)라고 불려진다. 원래 아주신씨 집성 마을이었으나 안동댐의 조성과 더불어 수몰 지역의 주민이 이주해 와서 신씨를 비롯한 몇몇 성씨들이 살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눈을 자극하는 모남이 없이 원만무애(圓滿無碍)한 글씨가 포근하다. 스승을 흠모하여 모시고 배우는 성스러운 공간인 만큼 화려함보다는 단아함을 드러내며 차분한 호흡으로 써 내려간 글씨이다. 굵고 부드러운 획이 이어지며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분위기가 ‘書(서)’ 자에 이르러 맑고 경쾌한 선으로 일거에 해소된다.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에도 낮처럼 환하다는 ‘丹邱(단구)’는 부드러운 원필(圓筆)을 사용하여 마치 복사꽃이 활짝 핀 것처럼 화사함이 가득하다 ‘院(원)’ 자 역시 ‘書(서)’ 자에서 잠시 긴장된 분위기를 화사하게 마무리하면서도 진중함을 잃지 않았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아주신씨 회당공파종중 소개
애당초 단구서원(丹邱書院)에 배향된 인물은 호계(虎溪) 신적도(申適道, 1574~1663), 나재(懶齋) 신열도(申悅道, 1589~1659), 인재(忍齋) 신채(申埰, 1610~1672) 세 분이었다가 나중에 만오(晩悟) 신달도(申達道, 1576~1631)를 추배(追配)하였다.
신적도는 본관은 아주(鵝州),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이다. 아버지는 흘(仡)이며,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 학문과 효행이 뛰어났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상운도찰방(祥雲道察訪)에 제수되었고, 병자호란 때 건원릉참봉(建元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867년(고종 4)에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호계집(虎溪集)』이 전한다.
- 신달도(申達道): 1576(선조 9)~1631(인조 9). 본관은 아주, 자는 형보(亨甫)이며, 호는 만오(晩悟)이다. 아버지는 흘이며, 조목(趙穆)과 장현광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 생원에 합격하였고, 1623년(인조 1)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 파직되었다가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오집(晩悟集)』이 전한다.
- 신열도(申悅道): 1589(선조 22)~1659(효종 10). 본관은 아주, 자는 진보(晋甫), 호는 나재(懶齋)이다. 아버지는 흘이며, 장현광의 문인이다. 10세 때 경사(經史)를 통달하였고, 1624년(인조 2) 증광시(增廣試) 을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였다. 서장관(書狀官)·예조정랑(禮曹正郎)·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울진현감(蔚珍縣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능주목사(綾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문소지(聞韶志)』를 펴냈으며, 문집으로 『나재집(懶齋集)』이 전한다.
- 신채(申埰): 1610(광해군 2)~1672(현종 13). 본관은 아주, 자는 자경(子卿)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적도(適道)이며, 장현광의 문인이다. 1646년(인조 24) 식년시(式年試) 진사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하였다. 저서로는 『인재집(忍齋集)』이 전한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구서원 영건전말丹邱書院營建顚末」, 『인재집(忍齋集)』 권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