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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당(興敎堂)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榮州 昌原黃氏 龜巖宗宅0

76.5×135.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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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흥교당(興敎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6.5×135.0
  • 건물명 흥교당(興敎堂)
  • 공간명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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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당(興敎堂)

흥교당(興敎堂)

흥교당(興敎堂)은 귀암(龜巖) 황효공(黃孝恭, 1496~1553)과 매음(梅陰) 나이준(羅以俊, 1602~1686)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 유림의 공의로 경상북도 영주시 망궐리에 건립한 사계서원(泗溪書院) 강당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영주 창원황씨(昌原黃氏) 귀암종택(龜巖宗宅)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35㎝, 세로 76.5㎝이다. ‘흥교(興敎)’는 오교(五敎) 즉 오륜(五倫)을 진흥시킨다는 의미이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서경』 「순전(舜典)」에서 순 임금이 말하기를 “설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륜을 따르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 가지 가르침을 펴되 너그럽게 하라[契 百姓不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 在寬]”라고 하였다.
1654년(효종 5) 사림에서 사계서당(泗溪書堂)을 망궐리 사계에 창건하였으며, 1703년(숙종 29년)에 묘우(廟宇)인 사당을 세우고 황효공과 나이준의 위패를 봉안하고 사계서원이라 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현판만 안정면 용산리 창원황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사계서당기문(泗溪書堂記文)」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짓고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은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이 지었으며 「흥교당중수기(興敎堂重修記)」는 황용한(黃龍漢, 1744~1818)이 지었다. 배유장(裵幼章, 1618~1687)이 지은 「남간서당이건기(南澗書堂移建記)」에 의하면 “1654년(효종 5) 군의 서쪽 망궐리(望闕里)에 서당을 세우고 사계서당(泗溪書堂)이라고 하였다. 사계서당이 건립되고 시간이 지난 뒤 형편상 불편한 점이 있어 1685년(숙종 11) 봄에 수임(首任)인 송시의(宋時議)가 김종미(金宗漢)·민약증(閱若曾) 및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상의하고 본리 안 광승촌(廣升村)에 터를 잡아 이건하였다. 서당의 크기가 협소함을 불만스럽게 여겨 중간에 2칸을 늘렸으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동쪽에 있는 방 하나를 헐어버렸다. 주사나 곳간도 모두 동시에 일을 일으켜 수개월이 걸려 공사를 마치게 되었는데 서당 아래에 ‘남간(南澗)’이란 연못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취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이 서당은 군에서 동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는데 자연히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여 관청이나 여염집과 서로 연접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가지 분주한 것도 이곳에 이르면 모두 그치게 되어 몹시 고요하고 적적하였으니 사람의 정신을 능히 수렴하게 할 만하였다. 평평한 언덕과 넓은 들판은 나의 수중에 든 물건이요, 긴 시내는 구불구불 흐르고 산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귀암(龜巖)은 오른편에 엎드렸고 성현(星峴)은 왼편을 둘러싸고 있으며 기타 천태만상으로 사랑스럽고 기이한 광경이 모두 눈만 들면 보이는데, 사방이 탁 트이고 넓어 사람의 흉금을 시원스럽게 하였으니 이것은 은미하면서도 광대하였으니 도시 속에서도 산림 속에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번현(樊峴) 한 줄기가 서쪽에서 뻗어와 뒤에 멈추었는데 산세가 대단히 단아하고 중후하며 곁에는 ‘풍영대(風詠臺)’라는 대가 있으니 상쾌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산 것이 몹시 많았겠지만 금방 왔다가 금방 떠나갔으니, 마치 기다리는 바가 있는 듯한데 서당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아! 봉향(奉香)은 본래 예악이 있던 곳이니 이건해서 다시 시작하는 때에 우리 모든 군자는 이 서당에서 공부하면서 각자 현명해지기를 생각하고, 현명하게 된 자는 또한 수시로 강론하고 학습하여 순서에 따라 나아간다면 가정에서 마을 글방으로, 마을 글방에서 고을 학교로, 그리고 나라의 태학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니 성취란 진실로 순서를 지키는데 달려 있다. 여러 군자들은 힘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중후한 획으로 구성된 글씨 속에 서늘한 느낌의 예리한 획이 곳곳에 숨어있다. 도학(道學)을 진흥시키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 정갈한 결구의 ‘興(흥)’ 자가 두 손 바르게 하고 자리하였다. 그러나 마치 의장대가 턱을 들고 부동자세를 취한 듯 과한 경직이 엿보인다. 엄한 선생님인 양 서릿발 같은 날카로운 획을 간직한 채 점잖은 모습으로 선 ‘敎(교)’ 자에 기댄 듯한 ‘堂(당)’ 자가 포근한 분위기로 당당하게 서 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창원황씨 귀암종택 소개

황효공(黃孝恭, 1496~1553)의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이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6세조 황석기(黃石奇, ?~1364)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원나라로부터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모시고 오자 공민왕이 그에게 창원을 식읍으로 주고 회산군(檜山君)이라는 호를 하사하였으며, 벼슬은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증조는 황지헌(黃智軒)이고 조부는 황무소(黃茂蘇)인데, 모두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였다. 부친 황진(黃璡, 1542~1606)은 벼슬이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에 이르렀으며, 어머니 고성이씨는 좌의정 이원(原)의 손녀이자 현감 이평(泙)의 딸이다. 황효공은 1521년(중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 및 형조와 호조의 좌랑을 역임했다. 1529년(중종 24)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여름 황해도도사로 부임하였다. 1530년(중종 25) 내직으로 돌아와 호조정랑과 승문원교리를 겸직했다. 1531년(중종 26)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1532년(중종 27) 금산군수가 되었으며, 1533년(중종 28) 겨울에 내직으로 복귀하여 형조정랑이 되었고, 제용감첨정으로 옮겼다. 1534년(중종 29) 한성부서윤을 거쳐 종부시첨정 겸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사간원사간을 역임하였다. 1535년(중종 30) 조카 황진우(黃陳宇)가 김안로와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핍(金克愊)을 비방하다가 이들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무고를 당했으며, 고초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황효공은 사간으로 있으면서 조카를 구호하려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고, 1536년(중종 31)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 낙향 후 황효공은 구암정사(龜巖精舍)를 짓고 매일 그곳에서 거처하며 독서하였다. 이때 호도 ‘구암’으로 하였다. 이황과 교유하였으며, 비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대문 밖에 나가서 맞고 보낼 만큼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공경하였다. 『역학계몽(易學啓蒙)』, 『황극경세(皇極經世)』, 『태극도(太極圖)』 등을 연구하여 「구암선생역범도(龜巖先生易範圖)」와 「제권양촌입학도설후(題權陽村入學圖說後)」 등을 지었고 이황에게 교정을 받았다. 1837년(헌종 3) 황효공의 10대손인 황인팔(黃鱗八) 등이 『구암집(龜巖集)』 2책을 간행하였다.
부인은 공주이씨(公州李氏)이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맏이는 익(釴)이고, 둘째 흠(欽)은 목사(牧使)에 추증되었다. 익은 3녀를 두었는데 맏사위 김기(金圻)는 참봉이고, 둘째 사위 김윤사(金允思)는 찰방(察訪)이고, 막내는 권집(權集)에게 출가하였다. 흠은 4남 1녀를 두었다. 맏이는 언수(彦樹)이고, 둘째 언주(彦柱)는 찰방이고, 셋째는 언려(彦欐)이고, 넷째는 윤계(胤季)이며, 딸은 직장(直長) 박환(朴瓛)에게 출가하였다. 영주의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일고(龜巖逸稿)』가 있다.
나이준(羅以俊, 1602~1686)의 본관은 수성(壽城), 자는 택우(宅于), 호는 매음(梅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나경문(羅景文), 증조할아버지는 영릉참봉을 지낸 나응두(羅應斗), 할아버지는 나세겸(羅世謙), 아버지는 집의로 증직된 나용(羅瑢)이다. 어머니는 성주배씨(星州裵氏)로 대구부사를 역임한 배응경(裵應褧, 1544~1602)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 4월 26일 경상도 현풍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 외가가 있던 경상도 영주시에서 성장하였다. 1635년(인조 13)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란 속에서도 정신국(鄭信國) 등 8인과 함께 성묘(聖廟)의 제기와 악기, 오성십철(五聖十哲)의 위판(位版)을 가지고 피난하여 고관들을 놀라게 했다. 1646년(인조 24)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전적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고, 1653년(효종 4) 병조좌랑, 사간언정언에 제수되었다. 1663년(현종 4)에는 사헌부장령을 거쳐 고부군수로 부임하였으며, 1675년(숙종 1)까지 수찬, 보덕, 교리, 부수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인해 부임과 사임을 반복하였고, 1676년(숙종 2) 세상을 떠났다. 나이준은 영천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숙이었던 배상익(裵尙益, 1581~1631)에게 학문을 배웠다. 영주 출신의 대표적 학자였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 등과 교유하였으며, 재실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집으로 『매음유집(梅陰遺集)』이 전한다. 부인은 공주이씨로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배유장(裵幼章), 「남간서당이건기(南澗書堂移建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