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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당(興敎堂)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77.6×156.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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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흥교당(興敎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7.6×156.5
  • 건물명 흥교당(興敎堂)
  • 공간명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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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교당(興敎堂)

흥교당(興敎堂)



흥교당(興敎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 있었던 분강서원(汾江書院)의 강당(講堂) 편액이다. ‘흥교(興敎)’는 ‘교육을 일으킨다’는 의미이다. ‘흥교당’은 8칸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분강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되며, 동쪽 협실은 재임과 별유사의 방이며,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교육을 일으키는 공간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는 글씨이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천이씨 농암종택(永川李氏 聾巖宗宅) 소개



흥교당(興敎堂) 편액이 있는 분강서원이 처음 위치했던 분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으로서 부내, 또는 분천(汾川), 분강촌(汾江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분천동(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내는 원래 영천이씨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고려말엽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小尹)을 지낸 이헌(李軒)이다. 이헌은 어지러워 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천석(泉石)이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안주(安住)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헌이 동네를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맑게 흐르므로 부내라 불렀다고 하며, 한자로는 분천(汾川)이라 한다. 이 마을은 이헌이 약 600년 전에 입향한 이후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었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었다. 현재 송티와 넘티 등 2개 마을에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분천리에 위치한 ‘분강서원(汾江書院)’은 농암 이현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분강(汾江)’이라는 이름은 이 곳 분천(汾川)에서 따왔다. 서원의 건립은 1612년 영천이씨 문중의 발의로 1613년(광해 5)에 세워진 향현사(鄕賢祠)에 농암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나라로부터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받았지만, 그의 정치적 면모나 학문적 계보를 이을 수 있는 지역적 기반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을 한탄한 영천이씨 문중은 1699년(숙종 25) 6월 2일 애일당(愛日堂)에 모였고, 비로소 농암의 학덕을 계승하기 위한 서원건립 작업이 시작된다. 이후 1700년(숙종 26) 서원으로 개편되었고, 1702년 10월 석채례(釋菜禮)를 행한 후 사당 안에 위판(位版)과 유상(遺像)을 함께 봉안하면서 서원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868년(고종 5)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7년 복원하였다. 1976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처지에 놓이자 도산면 운곡리에 위치한 영천이씨 도곡재사(道谷齋舍)의 옛터에 서원을 옮겼다가, 2007년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자연부락(맹개, 소두들, 가사리, 올미재) 가운데 하나]에 재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원내의 건물로는 4칸의 숭덕사(崇德祠), 8칸의 흥교당(興敎堂), 성정재(誠正齋), 6칸의 극복재(克復齋), 6칸의 경서재(敬恕齋), 유도문(由道門), 12칸의 주소(廚所), 협문(夾門)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숭덕사에는 이현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숭덕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강당인 흥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되며 동쪽 협실은 재임 및 별유사의 방으로,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재와 경서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정문인 유도문은 향사시 제관(祭官)의 출입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주소는 서원을 지키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분강서원’의 글씨는 해서체(楷書體)로 성세정(成世珽)이 썼고, 상량문은 조덕린(趙德隣), 기문(記文)은 장신(張璶), 봉안문(奉安文)은 김화(金璍)가 각각 지었다. 서원 내에는 서원창건의 전 과정이 적힌 「창원일기(創院日記)」와 「복원일기(復元日記)」를 비롯하여, 「영정개모일기(影幀改摹日記)」, 「전장기(傳掌記)」, 「부조기(扶助記)」, 「임사록(任司錄)」, 「분강영당영건소계첩(汾江影堂營建所稧帖)」, 「진설도(陳設圖)」, 「홀기(笏記)」 등의 적지 않은 자료가 남아 있어 서원 건축과 운영 실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유물로는 이현보의 영정과 100여 권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8,000평 등이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상사일(上巳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분강서원이 두 번째로 옮겨간 가송리에는 분천리에서 옮겨온 농암종택(聾巖宗宅)이 미리 자리해 있다. 농암종택은 안동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긍구당(肯構堂), 애일당(愛日堂) 등을 2005년 도산면 가송리로 모두 옮겨 종택을 복원한 것이다. 가송리는 이러한 이유로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농암종택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긍구당, 애일당, 사당[가묘(家廟)]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긍구당은 종택(宗宅)의 당호(堂號)로도 사용되던 별당이며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고, 애일당은 정자(누각)형의 별당으로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종택이 새롭게 자리한 가송리의 ‘가송(佳松)’은 주위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가득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종택 주변은 청량산과 낙동강이 어우러진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수려하다. 강호 시인으로 불렸던 농암이 “굽어보니 천 길 푸른 물, 돌아보니 겹겹 붉은 산…”이라며 ‘어부가’를 불렀을 법한 곳이다. 산수가 수려한 종택과 주위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농암 가문은 옛날부터 이름난 장수 집안이었다. 농암 이현보는 89세, 농암의 아버지는 98세, 어머니는 85세, 조부는 84세, 증조부는 76세, 고조부는 84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는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비중(棐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鬢翁). 시호는 효절(孝節). 예안(禮安) 출신. 아버지는 참찬 이흠(李欽)이다. 그의 호 농암(聾巖)은 “귀먹은 바위”란 뜻이다. 19세 때 부친의 명을 받고 예안향교(禮安鄕校)에 입학하였다. 20세 때는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文章家)였던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다. 1498년(연산 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34세(1500년) 때 처음으로 실직을 받았는데 함경도 영흥부의 향교 훈도(訓導)라는 종9품의 말직(末職)이었다. 1501년 사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 10) 38세 때 참상관으로 승진하여 같은 해 2월에 성균관 전적(종6품)이 되고, 4월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간관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의 안기역으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지평에 복직되었고, 1509년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발령을 받았다. 이어 밀양도호부사,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성주목사, 대구부사, 평해군수, 영천군수(榮川郡守)를 거쳐 경주부윤과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여러 차례 가장 우수한 지방관으로 선임되어 포상받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가는 곳마다 향교(鄕校)를 재정비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거행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지도자로서의 예절과 덕성을 연마하게 하는 한편 양로연이나 노인회를 자주 열어 효도를 권장하는 등 주로 교육과 도덕의 진흥에 초점을 두고 고을을 다스렸다. 1523년(중종 18)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자헌대부를 지냈다. 30여 년을 외직에 있으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선발되기도 한 농암이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후배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등과 친하였다. 한편 농암은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국문학사에서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농암은 강호문학의 전통을 국문 시가에 수용하여 이를 우리 현실에 맞도록 변형시켜 하나의 전통으로 재확립하였다. 농암이 만년에 벼슬에서 은퇴한 뒤 국문시가를 지은 동기는 한시가 소리 내어 읊을 수 있으나 노래로 부를 수 없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노래하는 시는 국문으로 지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농암의 <어부가(漁父歌)> 발문(跋文)이나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발문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농암은 1555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1556년 퇴계 이황이 「행장」을 지었다. 1557년에는 효절(孝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농암선생문집(聾巖先生文集)』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孝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聾巖先生文集』
  • 「聾巖先生年譜」
  • 「汾江書院創院日記」
  • 「汾江書院復元日記」
  • 『典故大方』
  • 『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 『서원총람』(안동군, 197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 http://www.ugyo.net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 농암종택 http://www.tourandong.com
  • 안동시청 홈페이지 https://www.andong.go.kr
  • 안동관광정보센터 http://www.tourandong.com
  • 한국서원연합회 http://www.seowonst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