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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정사(三乎精舍)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星州 法山 永川崔氏 視聽堂0

41.0×106.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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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삼호정사(三乎精舍)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1.0×106.3
  • 건물명 삼호정사(三乎精舍)
  • 공간명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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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정사(三乎精舍)

삼호정사(三乎精舍)

삼호정사(三乎精舍)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에 있는 시청당(視聽堂) 최성욱(崔性郁, 1896~1980) 가옥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성주 법산 영천최씨(永川崔氏) 시청당 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06.3㎝, 세로 41㎝이다. ‘삼호(三乎)’는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孔子)의 제자 증자(曾子)가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노니, 다른 사람과 함께 도모하면서 충실하지 못했던가? 벗과 함께 사귀면서 미덥지 못했던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던가?[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한 데서 취한 것으로, 이는 자신의 반성과 수양을 의미한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삼절(三絶, 세 번 끊어서 붓을 움직임)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도 율동적이며 날카로움이 드러나 글씨의 긴장감이 섬뜩하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하고 자기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한다)”의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라는 말을 시각적으로 웅변하는 것 같다. 짧은 획을 중첩하고 그 아래 넉넉하게 긴 획으로 받힌 ‘三(삼)’ 자가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乎(호)’ 자에서는 안팎으로 날카로움을 갖추고 긴장감을 이어가더니 ‘精(정)’ 자에서는 그야말로 정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舍(사)’ 자에서 다소 편안한 결구를 보여주지만 역시 예리함을 품고 있다. (서예가 遯石 양성주)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 소개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마을은 남쪽을 가로 흐르는 대가천 건너로 성주군과 고령군을 잇는 33번 국도가 있고, 오암서원(鰲巖書院) 앞 제방이 성주와 고령을 경계 짓는다. 동쪽 멀리 이봉산이 있고 마을 앞 별뫼산은 호랑이가 파수 보듯 엎드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서쪽으로는 국립공원 가야산이 병풍을 쳐놓은 듯이 우람한데, 남쪽 자라산은 덕은산성에서 완만히 내려와 기암 절경에 오암서원이 우뚝 서고 북에서 감토봉이 내리뻗은 끝자락인 진수봉이 학처럼 나래를 펴 홀로 법산마을을 아늑하게 감싸 안는다. 또 수도산과 가야산이 함께 발원해 넉넉하게 내려준 젖줄 대가천 물은 무흘구곡을 흘러 지나면서 오암 끝자락을 굽이치며 흘러내려 마을 앞 넓은 들녘을 일궈 뒤뜰 언덕에 옛날 남창(南倉)을 세울 만큼 아늑하고 풍요롭다. 또한 생활 터전으로써 풍광이 뛰어난 산자수명, 배산임수의 조건을 고루 갖춘 복된 고장이다.
이곳 법산마을은 영천최씨(永川崔氏) 문중의 집성촌이다.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은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최균(崔均)의 9세손 최식(崔寔)의 둘째 아들이다. 최한은 고려 때 예종과 명종 양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공을 세워 연산(영천의 별호)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영천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최씨는 시조 최한 이래 명현 거공이 대대로 배출되어 명문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영천최씨가 성주군에 정착한 것은 입향조인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1560~1638) 때이다. 그가 16세 때인 1575년(선조 8)에 부친 성균진사 최정(崔淨)이 성묘차 성주 법산에 왔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도움을 받아 3년 시묘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모친이 최항경에게 “벼슬을 원하지 않으면 굳이 서울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한강 선생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해 선영에서 가까운 법산에 자리를 잡았다.
최항경의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그는 한강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는 데 매진하였다. 1605년(선조 38) 증광시 생원에 합격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그래서 거처하는 부근에 오암정사(鰲巖精舍)를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으며, 이때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을 지었다.

“마음을 붙잡아 잠시라도 놓아버리지 마라. 이 마음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깊이 탐구하여 투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치에 의존하고 욕심을 막으며 옳은 방법에 따라 공경하고 바르게 행해야 한다.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를 이루는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힘쓰는 것이다.”

이후 한강이 예서를 저술할 때 최항경 삼부자는 스승의 저술 작업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한강이 사망하자 두 아들과 함께 친히 염빈을 하는 등 마치 부모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한강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앞장서서 교감을 하였고, 또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봉향하는 데도 적극 나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느라 직접 싸움터엔 나가지 못했지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초유격문(招諭檄文)에 감동하여 지은 시가 있다. 병자호란 때는 두 아들을 고령 창의진에 내보냈으나, 왕이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에 격분하는 원한시를 지었다. 1678년(숙종 4) 통훈대부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고, 1735년(영조 11) 두 아들 최은(崔𨏈), 최인(崔轔)과 함께 오암서원에 봉향되었다.
최항경의 맏아들 최은(崔𨏈, 1583~1656)은 자가 사행(士行), 호가 관봉(鸛峯)이다. 아우 최인과 함께 일찍이 부친을 따라 한강 정구에게 수업하였고, 아우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엔 뜻이 없고 오직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병자호란에 부친의 명을 따라 아우와 둘째 아들 최진화와 함께 고령 창의소로 나아가 문경까지 진출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비분강개한 시를 읊조려 울분을 토로하였다. 덕량이 중후하고 사리가 투철하여 사림 간의 의론을 선도하였으며 예학 이론에 밝아 『한강집(寒岡集)』을 교감(校勘)하였고 천곡·회연서원에서 교수로 후학양성에 진력하였으며,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드높였다.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에 증직되었으며 저서로 『관봉문집(鸛峯文集)』이 있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묘갈명에서 “법산은 높고 높으며, 가수는 하염없이 흐리네. 수하 삼현이라는 그 이름, 법산과 가수와 짝하여 높고 장구하리라[法山嵯嵯 伽水湯湯 水下三賢之名 配山水以高長]”라고 하였다.
최항경의 둘째 아들인 최인(崔轔, 1597~1644)은 자가 사발(士發), 호가 매와(梅窩)이다. 8세에 한강 정구에게 수학하였고, 한강 사후에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에게 종학(從學)하여 대학자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물자설(勿字說)」을 비롯하여 「송대인전(宋大人傳)」, 「퇴계이선생변무소(退溪李先生辨誣疏)」 등 저술이 많다. 병자호란 때 형제가 의군으로 출정하였으나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별호를 치광자(癡狂子)라 하였다. 오암서원에 배향되었고 『매와문집(梅窩文集)』이 있다. 필재(筆才)가 뛰어나 성주군청 뒤편에 위치한 성산관 현판 글씨를 써서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한편 성주 법산 영천최씨 시청당 집안은 입향조 죽헌 최항경의 후손이다. 시청당(視聽堂) 최성욱(崔性郁, 1896~1980)은 옥산서원과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고, 오암서원을 재창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부친 여와(餘窩) 최우동(崔禹東)은 궁내부주사와 승훈랑을 지냈다.

참고문헌
‘수륜면 법산 마을을 재조명하다(1)’, 성주신문 2017년 8월 16일 기사
김봉규, ‘불천위(不遷位) 기행 27. 죽헌(竹軒) 최항경’, 영남일보 2011년 6월 29일 기사
죽헌 최항경-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최은(崔𨏈), 『관봉문집(鸛峯文集)』
최인(崔轔), 『매와문집(梅窩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