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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덕사(尙德祠)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70.0×169.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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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상덕사(尙德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70.0×169.5
  • 건물명 상덕사(尙德祠)
  • 공간명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 서예가
  • 위치정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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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덕사(尙德祠)

상덕사(尙德祠)



상덕사(尙德祠)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한 도산서원 사당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69.5㎝, 세로 70㎝이다. ‘상덕(尙德)’은 덕인(德人)을 숭상한다는 뜻으로, 도산서원 설립 당시의 덕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하나, 1615년(광해 7)에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을 추향함으로 인해 지금은 두 분을 모두 지칭한다. 주벽인 퇴계 이선생(李先生)의 위패는 선성(宣城) 3필의 한 분으로 알려진 금보(琴輔, 1521~1584)의 글씨이고 동벽인 월천 조공(趙公)의 위패는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의 아들인 금학당(琴鶴堂) 이립(李苙, 1571~1616)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과 월천 조목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구성을 보면 이황이 생전에 건립한 도산서당과 이황 사후에 건립된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561년(명종 16)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기와집으로, 서당을 건립하기 전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지원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를 먼저 건립한 것으로 여기까지가 도산서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인 1574년(선조 7)에 지은 것으로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일종의 도서관의 성격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박약재(博約齋)와 동재 홍의재(弘毅齋), 원장실과 강학공간인 중앙의 전교당(典敎堂),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하는 제사공간인 상덕사(尙德祠),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인력이 거주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공간인 상고직사(上庫直舍)로 구성되었다.

글씨는 해서체로 되어 있는데, 손암(損菴) 조근(趙根, 1631~1690)의 「심도산서원일기(尋陶山書院日記)」에 의하면 전교당·한존재·박약재·홍의재·진도문 편액과 함께 심인조(沈仁祚, 1556~1605)가 썼다는 설이 있으나 확언하기는 어렵다.

묵직한 점과 곧은 직선에 더해서 부드러운 곡선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이황(李滉, 1501~1570)은 본관이 진보(眞寶), 자가 경호(景浩), 호가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춘천박씨의 양육을 받았으며, 소년기에는 숙부 이우(李堣)에게 배웠다. 34세 때인 1534년(중종 29)에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다. 호조좌랑이던 37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룬 뒤 39세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가 사가독서를 받아 독서당에 들어갔다. 42세 때 충청도어사로 나가서 탐학한 관리를 적발하였고, 45세 때 홍문관전한으로 있던 즈음에는 「왜의 사신을 거절하지 말기를 비는 소(乞勿絶倭使疏)」를 올렸다.

을사사화 뒤인 1546년(명종 19)에 토계(兎溪, 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이즈음부터 퇴계(退溪)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48세에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 서적, 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도록 하였다.

49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寒棲庵)에서 독서와 강학에 열중하였다. 52세 때에 홍문관교리가 되어 조정에 올라갔다가 집의, 부응교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얼마 뒤 형조참의, 병조참의가 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 전후로 내린 벼슬이 이십여 차례인데 사양하고 나가지 않거나 잠시 나갔다가 이내 돌아오곤 하였다. 53세에 한양에 있던 중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 그 내용을 수정하고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58세 때에는 전라도 장성 출신 선비 기대승(奇大升)의 질의를 받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변을 시작하였다. 편지를 통하여 오간 이 토론은 이황의 나이 66세 때까지 8년간 진행된 학술적 대토론이었다.

1561년(명종 16)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는데, 이후로는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하고 독서하며 저술하기에 열중하였다. 1567년(명종 22) 봄 명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자 마침 명종이 승하하였다. 선조가 등극하면서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명종의 행장을 짓고 이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1568년(선조 1) 우찬성이 되었으나 다시 사양하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그해 7월 대궐로 나아가 새로 등극한 선조 임금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또 경연에서 선조에게 「사물잠(四勿箴)」과 「서명(西銘)」, 『논어(論語)』, 『주역(周易)』을 강의하였다. 12월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9년(선조 2) 3월 여러 차례의 사직 상소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1570년(선조 3) 7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 지은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심경(心經)』을 강의하는 등 학문 탐구에 몰두하다가 그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례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묘소 앞 비문에는 이황의 유계(遺誡)에 따라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한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가 사경(士敬), 호가 월천(月川)·동고산인(東皐散人)·부용산인(芙蓉山人)이다. 아버지는 참판 조대춘(趙大椿)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권수익(權受益)의 딸이다. 조목은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으로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명종 21) 공릉참봉에 봉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뽑혀 집경전참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 종부시주부,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냈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 경상도도사, 충청도도사, 형조좌랑, 신녕현감, 영덕현령, 전생서주부, 공조정랑, 상서원판관, 금산군수, 단양군수, 합천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으면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 사재감정, 예빈시정, 공조참의, 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내고 사퇴하였다. 조목은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하면서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으로서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 이황의 문집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했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 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할 때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참배하고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 나갔다. 조목은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보물 제211호로 지정된 상덕사(尙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와가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전면에는 반 칸 후퇴하여 평주 4개를 설치하였다. 평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마루방을 꾸미고 신위(神位)를 모셨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고 마루 위에는 여러 겹의 왕골자리를 깔아 신성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봄과 가을 두 차례 향례(享禮)를 치르는데, 봄에 하는 춘기향례(春期享禮)는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내고 가을에 지내는 추기향례(秋期享禮)는 음력 8월 중정일(中丁日)에 지낸다. 향례 3일 전 제사를 지내는 유사들이 동·서재에 들어와 예를 갖추는 입재(入齋) 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담당 역할을 나누고 제수를 준비하고 진설하여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기까지 12단계의 경건하고 복잡한 의식을 집행한다.

참고문헌
  • 이황,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 조목, 『월천선생문집(月川先生文集)』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上)』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