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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정(三樹亭)

동래정씨 판서공파東萊鄭氏 判書公派

48.0×109.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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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삼수정(三樹亭)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8.0×109.0
  • 건물명 삼수정(三樹亭)
  • 공간명 동래정씨 판서공파東萊鄭氏 判書公派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청곡길 6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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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정(三樹亭)

삼수정(三樹亭)



삼수정(三樹亭)은 정귀령(鄭龜齡)이 1425년(세종 7)에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798번지에 세운 정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동래정씨(東萊鄭氏) 판서공파에서 기탁한 자료로, 크기는 가로 109㎝, 세로 48㎝이다. ‘삼수’는 정귀령이 옛 집터의 동남쪽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거기에 정자를 짓고서 삼수정이라 이름하고 자호로 삼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회화나무를 집 주변에 심은 역사는 멀리 상고시대 주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주나라가 조정에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어 삼공(三公)의 자리를 정하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 그루 회화나무는 삼공 벼슬을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다. 정귀령 역시 자손들이 삼공에 들기를 바라는 염원으로 심었다고 한다. 12세손 정재원(鄭在源)이 증언하는 가전(家傳)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삼수정이 무너지고 세 그루의 회화나무도 시들어 죽었는데 삼수정이 중건되고 난 후에 세 그루 중 한 그루에서 움이 돋아나와 성장한 것이 현재 남아 있는 고목의 회화나무라고 한다. 삼수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는데, 1829년(순조 29)에는 경상감사 정기선(鄭基善)이 중건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09년경 옛터에 다시 세운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삼수정은 현재 경북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씨는 상주목사를 지낸 정현(鄭玹)이 쓴 해서체이다. 윤필로 후덕하게 찍은 세 개의 횡획이 장단을 달리하며 버티고 선 것이 귀신같은 삿된 것은 얼씬도 못 할 것 같은 굳셈을 드러내며 회화나무가 심어진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수(樹)’ 자는 좌측의 ‘목(木)’을 빠른 붓질로 써 그 기세를 이어 짜임새 있는 중앙을 구성한 후 ‘촌(寸)’ 자 자리에 다시 ‘목(木)’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이체자로 구성하였다. ‘정(亭)’ 자는 붓에 강약과 지속의 변화미를 주어 회화나무가 바라다보이는 정자의 경쾌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동래정씨 판서공파東萊鄭氏 判書公派 소개



정귀령(鄭龜齡)은 조선 세종 때 사람으로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청곡리 198번지에 살았다.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예천 입향조로, 호는 삼수(三樹)이고, 정해(鄭諧)의 아들이다. 인덕과 학행이 뛰어나 조정에 전해져서 1424년(세종 6) 9월에 충남 홍성의 결성현감으로 부임하여 1425년(세종 7) 6월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비록 재임 기간이 짧았으나 선정을 베풀었기에 고을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 찬양하였다. 용궁 별곡촌에 터를 잡고 집 어귀에 손수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8개 기둥이 있는 정자를 지어 삼수정(三樹亭)이라 하였다. 무덤은 강 건너 지보면 마산리 산 45번지인 완담에 있다. 문종 때 형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중종 때 증손자 정광필(鄭光弼, 1462~1538)이 영의정이 되어 이조판서에 다시 증직되었다. 사림에서 1568년(선조 1) 삼수리사(三樹里祠)를 세워 제향하였으나,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서 1636년(인조 14)에 완담향사(浣潭鄕社)로 재건하였다. 정귀령의 후손 중에 정승이 8명이 나왔는데, 증손자 정광필, 5세손 정유길(鄭惟吉), 6세손 정지연(鄭芝衍)·정창연(鄭昌衍), 8세손 정태화(鄭太和)·정치화(鄭致和)·정지화(鄭知和), 9세손 정재숭(鄭載崇) 등이다. 또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 정인보(鄭寅普)도 그의 후손이다. 또 삼수정에 오르기 전 우측 편에는 사적비가 있는데 여기에는 완담향사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된 동래정씨 4대 7현의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정귀령을 필두로 그의 맏아들 정옹(鄭雍)과 셋째 아들 정사(鄭賜), 정옹의 손자 정환(鄭渙)과 정난종(鄭蘭宗)의 둘째 아들 정광필, 정환의 현손인 정영후(鄭榮後)와 정영방(鄭榮邦)이 그들이다.
청곡리는 풍양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원래 용궁 남하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합에 따라 ‘청감’과 ‘별곡’의 이름을 따서 청곡리라 하고 예천군 풍양면에 편입되었다. 청곡리는 별곡, 와우동, 도망절, 청감 등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수정이 위치한 곳은 별곡이다. 별곡은 별실이라고도 불린다. 동래정씨 세거지이며, 600여 년 전에 이곳을 개척한 정귀령이 지금의 청곡리 798번지 주위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스스로 ‘삼수정’이라 호를 삼고 살면서 낙동강 변의 벼랑이 있는 곳에 터를 잡았다고 별곡이라 했다고 한다. 또 여기 사는 정씨들의 조상인 정해(鄭諧)가 원나라에 갔다가 원의 순제로부터 궁녀 한 사람을 하사받았는데, 당별실(唐別室)이다. 당병실이 고려 말 어지러운 정국을 피하여 안동 구담에 와서 살 때, 그 마을을 ‘당별실’이라고 했다. 당별실이 자녀 하나 없이 재물만 탐하였기에 버리고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이 마을을 별실이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삼수정에 1829년(순조 29) 중건 당시에 후손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지은 기문이 걸려 있어 소개한다.

선을 쌓으면 후손이 반드시 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듯이 대저 사람이 몸에 어진 덕을 쌓으면 자손에게 반드시 성대해져서 멀리 나라에 드러나고 집안을 번성하게 한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그 뿌리가 견고하면 푸른 줄기와 푸른 가지가 비구름과 바람이 막아 천 년을 지나도 뽑히지 않는 기세가 있는 것과 같아서, 뛰어나고 이름이 드러난 사람은 집안에 훌륭한 조상이 있고, 아름드리나무는 그 아래에 배양해주는 토양이 있게 마련이므로, 이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는 조선조에 공훈과 덕행이 있고 작록(爵祿)을 누렸기에 영예로운 이름이 태상씨(泰常氏)의 정려에 기록되고 청묘(淸廟)의 뜰에 배식되었다. 우뚝이 명문거족이 된 것은 진실로 우리 결성현감 공이 닦은 덕을 좀먹지 않고 후손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공께서는 용궁 별곡에 집을 지으시고, 정자 뜰에다 직접 세 그루 나무를 심고써 정자의 이름으로 삼으셨는데, 공의 뜻은 왕진공(王晉公: 王祜)처럼 세 그루 회화나무를 심어 그 음덕이 자손에게 발복되기를 기약한 것은 아니나, 덕을 닦는 부절(符節)로 여김에는 실로 기약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난해 완담서원(浣潭書院)에 알묘하러 왔을 때, 여러 종인(宗人)이 이 정자에서 화수회를 만들어 유연히 조상을 추모하며 근본을 두터이 하려는 뜻이 있었고, 또 이 정자가 오래되었는데도 수리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지금 포정사(布政使) 기선(基善)이 영남 안찰사로 왔는데,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있어서 마음을 다해 구휼하자 백성들이 이에 소생하고 보리도 수확하게 되었다. 이에 개연히 말하기를 “이제야 내가 사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의 아름다운 덕행이 있었음에도 후손이 알지 못해서 밝히지 못했고, 안 뒤에는 닦지 못해서 어질게 하지 못했으니, 감히 세 그루 나무를 심어 선조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자의 옛 제도에 따라 새로이 꾸미고, 몇 이랑의 밭을 사서 사람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여러 종인이 이 소식을 듣고서 서로 말하기를 “어질도다! 수령이 정사도 잘하고 종중 일도 잘하는구나!” 하였고, 또 “수령이 근본을 두터이 하여 자손들에게 권면케 하니 참으로 성대하도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조의 아름다운 행실과 덕이 있으니, 행실이 닦여지지 않으면 마땅히 우리가 근심하고 덕이 닦여지지 않으면 마땅히 우리가 두려워해야지 어찌 정자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아! 고향 마을에 숭상하고 공경하는 정자를 새로이 지었거늘, 하물며 선조의 행실과 덕에 있어서랴. 선조에게 덕행이 있음에 자손들이 서로 함께 닦고 밝히는 것 또한 나무의 근원이 튼튼하고 가지가 무성해지면 그 근원을 북돋아주고 그 뿌리를 감싸주어서 오래도록 싹을 틔우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종중의 자손들이 이 정자에 오르면 이를 알길 바라노라.

삼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인데, 전면에는 담장 없이 사주문(四柱門)만 서 있다. 평면은 후면 어간에만 방 1칸을 마련하고, 나머지 칸에는 모두 우물마루를 깐 흔치 않은 평면형을 이루고 있다. 마루 칸은 전면에만 개방하고, 측면과 후면에는 판벽(板璧)과 판문(板門)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이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