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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극루(拱極樓)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55.0×156.5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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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공극루(拱極樓)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5.0×156.5
  • 건물명 공극루(拱極樓)
  • 공간명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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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극루(拱極樓)

공극루(拱極樓)



공극루(拱極樓)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沙堤)에 위치한 도계서원(道溪書院) 누(樓)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우계이씨 종택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10㎝, 세로 40㎝이다. ‘공극(拱極)’은 『논어』 「위정(爲政)」에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면 뭇별들이 그 별로 향하는 것과 같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이는 뭇별들이 사면으로 둘러싸고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으로, 군왕을 옹위하거나 온 천하가 귀부(歸附)하는 것을 비유한다.

정와(貞窩) 황용한(黃龍漢, 1744~1818)이 1817년에 쓴 「공극루기(拱極樓記)」에 공극루가 세워진 시기와 규모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 인용해보기로 한다.

죽계(竹溪)의 동쪽 20리에 도촌(桃村)이라는 곳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이 있고 서원의 사당은 견일사(見一祠)이다. 이는 옛날 단종 초기에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낸 이공(李公) 선생을 봉안한 곳으로, 그의 후손 취사공(炊沙公)도 함께 배향하였다. 서원은 모두 세 번 위치를 바꾸었다. 땅은 그윽하면서도 넓고 위치는 잘 정제되어 반듯하다. 당·재·주방·문·담장은 절차대로 완비하였으나 유독 문 위에 누가 없어서 함께 유람하는 선비들이 안타까워하였다. 지난 갑술년(1814)에 원장을 맡은 사문(斯文) 아무개와 감동(監蕫)을 한 사인(士人) 아무개가 빨리 누를 세울 것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누가 완성되니 10여 칸이고 높이는 3길이다. 곁에 2칸을 더해 방앞으로 오려면 좁았던 것을 편하게 하였다. 평편한 모래가 솜처럼 펼쳐져 있고 그 위에서 바람을 맞으면 구경하기에 참으로 좋았다. 2년 뒤인 병자년(1816) 겨울에 선생의 후손 재현(載鉉)이 나에게 들러 명칭을 묻고 또 그 일을 기록해줄 것을 청하였다.

위 기문에 따르면 공극루가 세워진 시기는 1814년(순조 14)이고, 규모는 10칸이고 높이는 3길이다. 그리고 누의 이름을 명명하게 된 것은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의 후손 이재현(李載鉉)의 요청으로 기인하였다. 황용한은 또 누의 이름을 공극이라고 붙인 이유에 대해 “북극은 변함이 없고 자신이 지향하는 길도 또한 변함없어서 방향이나 시절에 구애됨이 없이 그 위치에 있으며 그곳에서 절의를 다할 뿐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섬길 때 각각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만세를 내려옴에 공통된 바른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기세 좋은 묵직하면서도 빠른 붓놀림으로 큼직하게 공간을 꽉 채워서 쓴 글씨의 위세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우계이씨종택(羽溪李氏宗宅) 소개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은 본관이 우계(羽溪), 자가 영보(英甫), 호가 도촌(桃村)이다. 이수형은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20세에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 5품직을 받았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平市署令)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들인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려(趙旅)와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장인의 고향인 순흥 도지리(道知里 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이수형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21세에 은거하여 94세로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집이 있는 한양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자신이 지은 가옥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지리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엇창살만을 만들어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고, 북쪽 벽은 종이로 앞에 놓인 마루를 가리게 하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아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는 모두 장릉(莊陵 단종의 릉)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패가 봉향된 사당의 명칭도 ‘견일사(見一祠)’라 명명하였다.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의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砂)이다. 이수형의 현손이고, 참봉 이효신(李孝信)의 아들이다. 감곡(鑑谷)의 우계이씨 입향조인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병간호로 사직하였다. 1610년(광해 2) 성균관전적에 승진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으면서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이에 이이첨을 목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취사는 7일 동안 궐문(闕門) 밖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또 인수정(因樹亭)을 지어 시서(詩書)를 즐기며 삶을 마쳤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처절했던 난리의 상황을 기록한 『용사록(龍蛇錄)』을 남겼고, 영주지역에 대한 관심을 두어 『영주지(榮州誌)』를 간행하려고 서문까지 써놓았으나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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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황용한, 『정와문집(貞窩文集)』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