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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육재(果育齋)

마곡서원磨谷書院

60.0×104.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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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과육재(果育齋)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60.0×104.0
  • 건물명 과육재(果育齋)
  • 공간명 마곡서원(磨谷書院)
  • 서예가 김희수(金羲壽, 1760~1848)
  • 위치정보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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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육재(果育齋)

과육재(果育齋)



과육재(果育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에 있던 마곡서원(磨谷書院) 서재(西齋)의 편액인데, 건물은 현재 없다. ‘과육(果育)’은 “과단성 있게 행하여 덕을 기른다[果行育德]”에서 나왔다. 서원의 젊은 유생들이 배우기를 열심히 하고 성현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함이 없이 하여 도의를 길러 나간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몽괘(蒙卦)_상전(象傳)」에 “산 아래 샘이 솟아나는 것이 몽(蒙)이니, 군자가 본받아서 물처럼 과감하게 행동하며 산처럼 덕을 기른다[山下出泉 蒙 君子以果行育德]”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 즉, 군자의 목표는 모두가 때에 따라 중도를 얻는 데[時中] 있음을 이야기한다. 서원의 유생들이 유교 경전의 구절을 떠올리고 그 구절이 말해주는 교훈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과육’이라는 편액의 명칭에 확고히 드러나 있다.

글씨는 동원(東園) 김희수(金羲壽, 1760~1848)의 친필로, 조금 부자연스럽지만 획이 굵고 힘이 있는 해서체이다.

‘果’와 ‘育’ 두 글자의 견고하고 단단한 필획에서 군기가 바짝 든 군인의 부동자세가 연상된다. 게으름 없이 철저하게 공부하리라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齋’ 자에서는 도학(道學)에서 얻은 지식을 바로 실천하려는 듯 속도감을 더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마곡서원(磨谷書院) 소개



과육재(果育齋) 편액이 있는 마곡서원(磨谷書院)은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에 있다. 마을 동쪽에 위치하여 마을로 들어서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본래의 위치는 폐교된 녹남초등학교 바로 앞에 있었는데 나중에 이곳으로 옮겼다. 마곡서원은 마곡서당(磨谷書堂)에서 출발한다. 윤의정(尹義貞, 1525∼1612)의 「마곡서당기(磨谷書堂記)」에 의하면, 1599년(선조 32)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1602년(선조 35) 봄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603년(선조 36) 가을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마곡서당은 1634년(인조 12) 마곡정사(磨谷精舍)로 바뀌었고, 1786년(정조 10) 마곡리사(磨谷里社)로 바뀐 뒤, 1828년(순조 28) 마곡서원으로 승격하였다. 마곡서원은 변계손(卞秀孫)을 비롯한 7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1714년(숙종 40)에 중수되었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며, 그 뒤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하였다. 건물 중수는 1973년과 1993년에 있었으나 현재 기와로 된 강당 1동만 남아 있다. ‘마곡’이라는 서원의 이름이 좀 이상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주자(朱子)의 강마유지(講磨有地)의 뜻을 취하였고, 본래 서원 근처 산골짜기의 이름이 마곡(磨谷)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로 ‘숫돌에 쇠붙이를 가는 골짜기’란 뜻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이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옛날에는 이곳이 쇠를 다스리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1994년 발행된 『안동의 서원(安東의 書院)』의 사진자료를 참고하면 강당 외 작은 별채가 있었으나 1993년 중수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주위 담장도 새롭게 둘러졌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인 숭렬사(崇烈祠)·강당(講堂)인 경모당(敬慕堂)·동재(東齋)·서재(西齋)·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전사청(奠祀廳)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강당만 남아 있다. 마곡서원은 변계손(卞秀孫)·김유용(金有庸)·이완(李完)·김생명(金生溟)·박사희(朴士熹)·류빈(柳贇)·윤의정(尹義貞)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현재는 향사를 지내지 않는다. 강당에는 옛 마곡서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현판들이 남아 있는데, 마곡서원(磨谷書院), 마곡서당(磨谷書堂), 숭현사(崇賢祠), 마곡정사(磨谷精舍), 오교당(五校堂), 적도문(迪道門), 과육재(果育齋), 오학재(五學齋)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현판들로 보아 강당은 오교당이었으며 7현을 모시는 숭현사, 동재는 오학재, 서재는 과육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서원으로 진입하는 문은 적도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규모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때 훼철(毁撤)되었던 다른 서원들은 복원되었지만 마곡서원은 복원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마곡서원에 모셔진 분들의 약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변계손(卞季孫, 1368∼?):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했다. 1404년(태종 4) 안동판관을 거쳐 세종조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안동판관으로 부임하여 예안현에 마곡서당(磨谷書堂)을 짓고 사람들을 가르침으로써 학문을 진흥시켰다.

②김유용(金有庸, ?∼?): 본관은 영양(英陽)이며,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③김생명(金生溟, 1504∼1577):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호(士浩)이며, 호는 눌재(訥齋)이다. 31세 때인 1534년(중종 28)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한 뒤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산훈도(慶山訓導)와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이황은 독지역학(篤志力學)을 칭찬하였다.

④박사희(朴士熹, 1508∼1588): 박선(朴善)의 14대손으로, 본관이 함양(咸陽), 자는 덕명(德明), 호는 묵재(默齋)이다. 훈도(訓導) 박형(朴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돈용교위(敦勇校尉) 정양명(鄭揚名)의 딸이다. 반룡산(蟠龍山) 아래 낙동강변에 거처하였기에 반계(蟠溪)라 자호하고, 성리학에 침잠, 실천궁행에 힘썼다. 그 뒤 이황이 도산(陶山)에서 도학을 강론하여 후진을 양성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집도 그곳에 가까운 가야촌[佳野村, 현 사신리(四新里)]에서 날마다 정진했다. 퇴계가 그를 높게 평가하여 ‘우유염어침잠묵지(優游厭飫沈潛默識)’라는 여덟 글자와 함께 묵재(默齋)라는 호를 주었다. 학행으로 의흥훈도(義興訓導)가 되었다. 요성산(堯聖山) 아래 격양정(擊壤亭)[퇴계선생 필적]을 지어 학문에 힘썼다.

⑤이완(李完, 1521∼1596):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자고(子固)이며, 호는 기암(企庵)으로 퇴계 이황의 중형(仲兄) 하(河)의 장자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문사(文辭)와 필법(必法)이 모두 뛰어나 “가업(家業)을 이어갈 사람은 바로 완(完)이다”라고 칭찬하고 성리서책(性理書冊) 한 질을 내려 격려했다고 한다. 요산정(樂山亭)을 짓고 학문에 힘썼다. 사마시에 합격해 영천훈도(永川訓導)를 지냈다.

⑥류빈(柳贇, 1520∼1591):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미숙(美淑)이며, 호는 권옹(倦翁)이다. 문과에 불리하자, 과거에 뜻을 굽히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대전(性理大全)과 경전(經傳)의 요점을 뽑아 『대전절요(大全節要)』 한 책을 만들어 퇴계 이황에게 질의하였다. 역학(易學)에도 밝아 『역도오십이본(易圖五十二本)』을 지었다.

⑦윤의정(尹義貞, 1525∼1612):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이직(而直)이며, 호는 지령(芝嶺)이다. 기암(企庵) 이완(李完, 1521∼1596)·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 1588년(선조 21) 현학교수(縣學敎授)가 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지산(芝山) 위에다 집을 짓고 ‘지령산인(芝嶺山人)’이라고 자호하였다.

참고문헌
  • 윤의정(尹義貞), 「마곡서당기(磨谷書堂記)」
  • 『안동의 문화유산』
  • 『안동의 지명유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유교넷 http://www.ugyo.net/
  • 진성이씨대종회 - 眞寶(眞城)李氏 遺蹟-齋宇 http://www.jinseong.org/
  • 전재강, 『선비문학과 소수서원』, 박이정,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