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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존사(道存祠)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44.0×77.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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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도존사(道存祠)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44.0×77.0
  • 건물명 도존사(道存祠)
  • 공간명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 서예가 오경기(吳慶基, 1623~1697)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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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존사(道存祠)

도존사(道存祠)



도존사(道存祠)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55-1에 위치한 오계서원(迃溪書院) 사당(祠堂)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오계서원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77㎝, 세로 44㎝이다. ‘도존(道存)’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자로(子路)가 일찍이 공자(孔子)에게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고자 하신 지 오래였는데, 만나고 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그런 사람은 한 번만 보아도 도가 있는 줄을 알 수 있으니, 또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若夫人者 目擊而道存矣 亦不可以容聲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계서원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건립 과정은 다음과 같다. 1570년(선조 3) 여름에 간재 이덕홍이 그의 나이 30세에 태조봉(太祖峯) 남쪽 기슭[현재의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천마을 동남쪽]에 학문과 마음을 닦고 후학을 기르기 위하여 迃溪精舍)를 건립하여 동재(東齋)를 관성재(觀省齋), 서재(西齋)를 관서헌(觀書軒)이라 하였다. 그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중에 병화로 정사가 퇴폐된 것을 1600년(선조 33) 장남인 선오당(善迃堂) 이시(李蒔, 1569~1636)가 오천마을의 서북쪽 쌍계(雙溪) 위에 옮겨 세웠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5월 21일 대홍수로 서당의 모든 건물이 유실되었고 관성재 현판만 오천에서 10리 떨어진 공신정(拱辰亭) 바위 아래에서 겨우 찾아내었다. 1663년(현종 4) 여름에 향내의 선비들이 사당의 건립을 논의하여 1665년(현종 6) 10월 도존사에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1691년(숙종 17)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강당을 명륜당(明倫堂), 정문을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1711년(숙종 37) 현재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여 복설하였고, 1724년(경종 4) 사림의 공의(公議)로 선오당 이시를 추향하였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8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복설 및 중수 과정을 살펴보면, 1919년 복향하기 위하여 명륜당 등을 다시 세웠고, 이후 1973년 입도문을 중수하였으며, 1975년 관성재와 험위료(驗爲寮)를 중수하였다. 또 1977년 음력 3월 도존사를 중건하고 이듬해에 복향(復享)하였다. 그 뒤 1993년 12월 중순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주소(廚所)를 중건하였다. 2005년 1월 10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향례(享禮)는 매년 음력 3·9월 중정일(中丁日)에 행하고 있다.

도존사의 편액 명칭은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가 지었다. 그가 지은 「봉안문」이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자질은 맑고도 순수하고, 자태는 빼어나고 단아했네
일찍이 귀의처를 얻어, 도산에서 입설하였네
한평생 직접 배우면서, 인과 의를 실천하길 바랐네
보고 느낀 것이 깊었고, 자세히 살피고 상세히 기억했네
행의가 이미 드러났으며, 명성은 사방에 전파되었네
작은 관직도 낮게 여기지 않고, 곧 백성과 사직을 위하였네
훌륭한 정사 막 펼치려는데,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거상을 잘하려다가 몸이 상해, 상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였네
고상한 풍모 멀어지고, 세월이 덧없이 흘러
고향은 처량해졌으나, 아름다운 자취 완연하네
원근에 두루 자문하여, 정결한 사당을 세웠네
산과 냇물이 반기고, 경물은 빛을 더하였네
이에 길일을 정하여,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며
짧은 제문지어 향 피우니, 정령께서 흠향 하소서

또 「상향축문」이 있어 옮겨보기로 한다.

信道之篤 도를 믿음이 독실하고
制行之端 몸가짐이 단아하였네
水長山高 긴 강물과 높은 산처럼
餘芳不刊 남은 향기 영원하리라

도존사에는 간재 이덕홍의 위패와 그의 장남 선오당 이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데, 훼철되기 전의 위판은 진성(眞城) 이극철(李克哲, 1624~1712)이 썼고, 복설 뒤에는 후손 이유길(李有吉)이 썼다.

글씨는 이계(伊溪) 오경기(吳慶基, 1623~1697)가 쓴 해서체이다.

‘道’ 자의 경쾌한 분위기가 도(道)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핵심 규범으로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짝 작게 쓰였지만 짱짱한 느낌의 ‘存’ 자는 유학의 도를 잘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다시 묵직한 느낌의 ‘祠’ 자가 끝에 와서 시작의 경쾌한 분위기가 제멋대로 흐르지 않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소개



이덕홍(李德弘, 1541~1596)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굉중(宏仲), 호가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3년 뒤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에는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덕홍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고,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귀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 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덕홍은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똑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한편 이시(李蒔, 1569∼1636)는 자가 중립(中立), 호가 선오당(善迃堂)이다. 이덕홍의 장남으로 오천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일찍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어지러운 과장(科場)의 모습을 보고는 도를 굽혀 명예를 따르지 말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을 단념하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그가 오계서당에서 성학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스승 정구(鄭逑)와 학우 장현광(張顯光)이 찾아와 ‘대를 이은 가학’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역리와 도학에 정통하여 앞일을 예지하는 경지에 이르러 광해군 때 당쟁이 극심해지자 조정에서 벼슬하는 아우 4형제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36년(인조 14) 세상을 떠났다. 1724년(경종 4) 오계서원(迃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선오당일고(善迃堂逸稿)』가 있다.

도존사(道存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으로, 내삼문이라고 부르는 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면 구성은 전면에 반 칸의 퇴간을 두고 그 뒤쪽으로 우물마루를 깐 3통간(通間)을 두었다. 상부가구(上部架構)는 3량가(樑架)이고,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에 한실골기와를 이었다.

참고문헌
  • 장재호·김우동 역, 『간재집』, 한국국학진흥원, 2018이재곤, 『오계서원』, 오계서원, 2008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