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존재(閑存齋)
한존재(閑存齋)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위치한 도산서원 전교당 서편 온돌방의 편액이다. 이곳은 원장의 거실이자 원무를 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편액은 도산서원 운영위원회에서 기탁한 것으로, 편액의 크기는 가로 147.1㎝, 세로 57.1㎝이다. ‘한존(閑存)’은 『주역』 「건괘(乾卦)_문언(文言)」에 “평상시 말을 신의 있게 하고 평상시 행동을 삼가서, 사악함을 막고 그 성실함을 보존한다[庸言之信 庸行之謹 閑邪存其誠]”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이 말을 두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사악함을 막아서, 당연히 스스로 그 성실함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다[言防閑邪惡 當自存其誠實也]”라고 하였다.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1574년(선조 7)에 세워졌으나, 현재의 구성을 보면 이황이 생전에 건립한 도산서당과 이황 사후에 건립된 도산서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이 1561년(명종 16)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기와집으로, 서당을 건립하기 전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지원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를 먼저 건립한 것으로 여기까지가 도산서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리고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인 1574년(선조 7)에 지은 것으로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일종의 도서관의 성격인 좌우의 광명실(光明室),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재 박약재(博約齋)와 동재 홍의재(弘毅齋), 원장실과 강학공간인 중앙의 전교당(典敎堂), 퇴계와 제자 월천 조목을 배향하는 제사공간인 상덕사(尙德祠),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행해지는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서원의 운영과 관리를 상시적으로 지원하는 인력이 거주하며 숙식을 제공하는 공간인 상고직사(上庫直舍)로 구성되었다.글씨는 해서체로 되어 있는데, 손암(損菴) 조근(趙根, 1631~1690)의 「심도산서원일기(尋陶山書院日記)」에 의하면 한존재·박약재·홍의재·상덕사·진도문 편액과 함께 심인조(沈仁祚, 1556~1605)가 썼다는 설이 있으나 확언하기는 어렵다.
도산서원 운영위원회(陶山書院 運營委員會) 소개
이황(李滉, 1501~1570)은 본관이 진보(眞寶), 자가 경호(景浩), 호가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춘천박씨의 양육을 받았으며, 소년기에는 숙부 이우(李堣)에게 배웠다. 34세 때인 1534년(중종 29)에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다. 호조좌랑이던 37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룬 뒤 39세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가 사가독서를 받아 독서당에 들어갔다. 42세 때 충청도어사로 나가서 탐학한 관리를 적발하였고, 45세 때 홍문관전한으로 있던 즈음에는 「왜의 사신을 거절하지 말기를 비는 소(乞勿絶倭使疏)」를 올렸다.을사사화 뒤인 1546년(명종 19)에 토계(兎溪, 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이즈음부터 퇴계(退溪)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48세에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 서적, 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도록 하였다.49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서암(寒棲庵)에서 독서와 강학에 열중하였다. 52세 때에 홍문관교리가 되어 조정에 올라갔다가 집의, 부응교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얼마 뒤 형조참의, 병조참의가 되었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 전후로 내린 벼슬이 이십여 차례인데 사양하고 나가지 않거나 잠시 나갔다가 이내 돌아오곤 하였다. 53세에 한양에 있던 중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 그 내용을 수정하고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58세 때에는 전라도 장성 출신 선비 기대승(奇大升)의 질의를 받고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변을 시작하였다. 편지를 통하여 오고간 이 토론은 이황의 나이 66세 때까지 8년간 진행된 학술적 대토론이었다.1561년(명종 16)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는데, 이후로는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하고 독서하며 저술하기에 열중하였다. 1567년(명종 22) 봄 명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과 함께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자 마침 명종이 승하하였다. 선조가 등극하면서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명종의 행장을 짓고 이내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1568년(선조 1) 우찬성이 되었으나 다시 사양하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그해 7월 대궐로 나아가 새로 등극한 선조 임금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또 경연에서 선조에게 「사물잠(四勿箴)」과 「서명(西銘)」, 『논어(論語)』, 『주역(周易)』을 강의하였다. 12월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다.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569년(선조 2) 3월 여러 차례의 사직 상소 끝에 고향에 돌아왔다. 1570년(선조 3) 7월에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 지은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심경(心經)』을 강의하는 등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가 그해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례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묘소 앞 비문에는 이황의 유계(遺誡)에 따라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서쪽의 정면 1칸, 측면 2칸은 온돌방으로 ‘한존재(閑存齋)’라 이름 붙였고, 나머지 정면 3칸, 측면 2칸은 우물마루로 된 대청을 만들었다. 온돌방의 전면에는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여닫이 세살창을 설치하였고, 좌측면에는 각 칸마다 외여닫이 세살문을, 벽장 좌측면에는 붙박이 광창을 달았다.청방간(廳房間)에는 폭이 다른 사분합 들문을 두고, 방 뒤쪽으로는 벽장으로 통하는 외여닫이 미닫이문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전면은 개방되어 있으나, 우측면과 배면에는 각 칸마다 둔테에 달린 쌍여닫이 판장문을 두고 문틀 중앙에는 가운데 설주를 설치하였다. 쪽마루는 건물 배면의 대청 뒷부분과 온돌방의 좌측면에만 시설하였다. 화강석 장대석으로 축조한 기단 위에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모두 각주를 사용하였다.가구는 5량가의 민도리계이다. 대량 위에는 윗면이 사절된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과 중도리를 받았으며, 종량 위에는 안초공을 둔 복화반(覆花盤) 형식의 대공을 세워 장혀와 종도리를 받았다. 대청 상부는 연등천장(椽燈天障)으로 하였으나 외기 부분은 반자로 구성하였으며 온돌방은 고미반자로 처리하였다.도산서원 전교당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2011년 현재 도산서원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황,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上)』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