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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서원(寒泉書院)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34.0×123.0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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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한천서원(寒泉書院)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4.0×123.0
  • 건물명 한천서원(寒泉書院)
  • 공간명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 서예가
  • 위치정보 경상북도 영주시 한정로124번길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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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서원(寒泉書院)

한천서원(寒泉書院)



한천서원(寒泉書院)은 1786년(정조 10)에 과재(果齋) 장수희(張壽禧, 1516~158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주시 문정리에 건립한 서원의 편액이다. 이 편액은 반남박씨(潘南朴氏) 판관공파 소고문중에서 기탁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123㎝, 세로 34㎝이다. ‘한천’은 『주역』 「정괘(井卦) 구오(九五)」의 효사에 딸린 상전(象傳)에 “시린 샘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모자람이 없으며, 치우침이 없이 곧고 올바르기 때문이다.[寒泉之食 中正也]”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에 대한 정자(程子)의 전(傳)에 “시린 샘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우물의 도에 지극히 선한 것이니, 구오의 중정한 덕이 지극히 선한 뜻이기 때문이다.[寒泉而可食 井道之至善者也 九五中正之德 爲至善之義]”라고 한 데서 취한 말이다. 한천서원에 오운(吳澐) 박회무(朴檜茂), 박종무(朴樅茂)의 신위를 추가 배향하였는데, 원래 이들의 신위는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가 1786년 한천서원에 분봉되었다. ‘봉안문(奉安文)’은 이급(李級)이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이수정(李守貞)이 지었다. 지금은 영주시 가흥1동에 ‘한천서원 4선생 유허비(寒泉書院四先生遺墟碑)’만 세워져 있다.

글씨는 양각으로 된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칼 같은 예리함을 살려서 쓴 ‘한(寒)’ 자에 그 서늘함을 안은 물이 맺히는가 하더니 드디어 흘러내리는 시원함을 보여주려는 듯 ‘泉(천)’ 자가 시원하다. 의지에 찬 듯 묵직한 획을 중첩시킨 후 세로획으로 단단히 꿰고 아래를 넉넉한 품으로 마무리한 ‘서(書)’ 자는 만고의 진리를 품고 있는 책의 품성을 보여주려는 듯 당당하기만 하다. 다소 빨라진 붓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 마지막에 ‘원(院)’ 자를 이루었는데 그로 인하여 편액 전체의 묵직한 엄숙함에 여유마저 더해주고 있다.(서예가 遯石 양성주)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소개



장수희(張壽禧, 1516~1586)의 자는 우옹(祐翁), 호는 과재(果齋).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조부는 장맹우(張孟羽)이고, 부친은 장응신(張應臣)이다. 외조부는 감천문씨(甘泉文氏) 문경동(文敬仝)이고, 처부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사언(黃士彦)이다. 퇴계 이황이 초곡에 있을 적에 장수희가 겨우 여섯 살의 나이로 책을 끼고 공부를 하러 가면, 매우 친절하고 절실히 가르쳐주었다. 뒷날 퇴계가 최락당(最樂堂)이란 글씨를 직접 써서 편액하게 되었다. 장수희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창건에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동안 규모를 세우고 비용을 보태었다. 모든 절목을 퇴계에게 품정(稟定)받았으니 이는 『퇴계문집』 안에 기록되어 있다. 음직으로 어모장군을 지냈으며 향년 71세였다. 형조참의를 증직받았으며 한천서원(寒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영주에 입향한 것은 중종 때 연복군(시호 안양공) 장말손의 손자인 장응신(張應臣, 1490~?)에 의해서이다. 화기리의 인동장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올라 보문각직제학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하고 있다. 장계의 아들 장비(張備)가 예문관제학, 4대 장전이 삼사 우윤, 6대 장안랑이 홍산현감을 지내고 옥산군(玉山君)에 봉해졌다. 장안랑의 3남 장말손은 세조 때 문과에 올라 이시애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2등에 책록되고 연복군에 봉해졌으며, 예조참판을 지냈다. 연복군은 인동에서 경기도 창동에 옮겨 살다가 낙향하여 예천 화장에 터전을 마련했다. 그의 아들 장맹우가 중종 초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교리를 지내다가 권신 김안로에게 거슬려 황해도사로 좌천되어 일찍 죽으니, 바로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인 장응신의 아버지다. 부친이 일찍 죽자 가세가 기울어진 장응신은 당시 총각으로 그 아우 장응필과 함께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이곳 영주에 이르러 초곡에 사는 문경동(文敬仝, 1457~1521)의 사위가 되어 영주에 정착하게 된다. 문경동은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그의 큰딸은 허씨에게 출가했는데 퇴계 이황의 장모이기도 했다. 그 후 영주에서 장응신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장응신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장윤희(張胤禧)는 부사직을 지냈고, 차남 장순희(張順禧)가 주부를 역임하였으며, 삼남 장수희(張壽禧)는 퇴계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았다. 장응신은 31세에 “맏이는 벼슬도 하지 말고, 부자도 하지 말고, 자손 보전 할 곳을 찾아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후 이 유명이 이 집의 가훈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장수희의 아들 사계(沙溪) 장여화(張汝華)도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아 사림에 추종되었다. 장여화의 손자 금강(錦江) 장신(張璶)도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독실하여 사림에 추앙되었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감찰·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꽃계의 인동장씨는 장윤희의 아들 장언상에게서 시작된다. 화기리 인동장씨 종택도 장언상의 생존 시기인 16세기 중엽(1522~1566)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급(李級)이 지은 「한천서원 봉안문(寒泉書院奉安文) 」 일부를 옮겨보기로 한다.

당에 오르면 숙연하여 전형(典刑)이 남아 있는 듯하고,
방 안에 들어가면 어렴풋이 목소리 들리는 듯하네.
선생께서 베풀어주신 은혜, 어느 곳에서 다 갚을까.
오직 위패를 봉안하며 숭모할 뿐이네.
많은 세월이 흘러 밝아질 때를 기다렸네.
금년이 무슨 해인가? 세상이 밝아지는 때이네.
선비들이 일제히 분격하여 봉안식을 거행하려 하네.
이곳이 아니면 어느 곳으로 가랴? 이에 우리 소유의 땅에 지었네.
선생을 제사 지냄에, 이산서원의 옛 법식대로 하였네.
사당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눌재(訥齋)를 모신 사당에 배향하네.
산천정사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옮겼네.
번거롭게 하지 않고 순조롭게 이룩하였네.
이 좋은 때가 되니 눈이 그치고 바람이 맑네.
문하의 제자들이 일제히 정성을 다하고 먼 곳에서 와서 예식을 보네.
우리 몇 분의 현인도 함께 저 한 사당에 모셨네.
외롭지 않고 함께 있으니 전현(前賢)을 빛내고 후인을 일깨워주네.
제기를 정갈하게 하고 제수를 성대히 마련했네.
이제부터 길이 영원하리라.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48 반남박씨 소고문중』,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6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