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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고가(忠孝古家)

원주변씨 간재종택(原州邊氏 簡齋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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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충효고가(忠孝古家)
  • 글자체 예서(隸書)
  • 크기 44.5x104.5x1.7
  • 건물명 충효고가(忠孝古家)
  • 공간명 원주변씨 간재종택(原州邊氏 簡齋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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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고가(忠孝古家)

충효고가(忠孝古家)


충효고가(忠孝古家)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 금계리의 원주변씨(原州邉氏) 간재종택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간재종택은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83∼1660)의 아호인 간재를 따 이름을 붙였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당시 80여 세의 조모가 노쇠하여 거동할 수 없었는데, 왜구가 들이닥쳐 칼로 위협하자 변중일이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왜구에게 애걸했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왜구들이 깃발 하나와 칼 한 자루를 그 집 문에 매달아 놓아 뒤따라오던 왜구들의 침입을 막았다. 조모가 별세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화왕산성에서의 전투를 도왔으며 인조가 붕어하자 1년 동안 소식(素食)을 하였다. 이렇듯 효성과 충성을 겸비한 변중일에게 그의 사후인 1686년 정충효각(旌忠孝閣)이란 정려가 세워져 현존하고 있다. 충효고가라는 편액은 이 정려각에서 유래했다. 변중일은 만년에 간재정을 지어 임진왜란의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전념했다. 변중일은 「간재기」를 지었는데, “내가 간(簡)에서 의미를 취하는 것은 예가 번중하고 화려한 것보다 간(簡)하여 질박한 것이 낫고 일이 번중하여 갖추어진 것보다는 간(簡)하여 정리된 것이 낫고 말이 번중하고 세련된 것 보다는 간(簡)하여 투박한 것이 낫다는 점 때문이다. 간(簡)은 중(中)에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오도(吾道)에 해가 되지는 않으며, 궁극적으로 편중되지 않고 중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니, ‘경에 자리하면서 간을 행한다.[居敬而行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하여 자신의 지향을 밝혔다. ‘간재’의 간(簡)은 『논어』 「옹야雍也」에서 “몸가짐을 경건히 하고서 대범하게 행사한다.[居敬而行簡]”에서 따왔다. 현판의 글씨는 예서로 쓰였다.

파책이 없는 전한시대 예서를 고예(古隷)라 한다. 후한시기 예서인 한예(漢隷)에 비하여 수경소직(瘦勁疎直)하다고 평한다. 필획은 살집이 없이 마르고 굳세며 자형의 짜임새는 성글고 필획의 연결부는 곡선이 아니라 직선의 맛이라는 뜻이다. 파책이 없다는 점에서 이 편액 글씨는 고예로 볼 수 있으나 두툼한 횡획이 있어 瘦(수)는 아니다. 수경소직(瘦勁疎直)의 특징인 가늘고 파리한 맛이라기보다 두툼한 필획의 고풍스런 맛이 좋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원주변씨 간재종택(原州邊氏 簡齋宗宅) 소개


간재종택과 간재정이 있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금계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변씨, 의성김씨(義城金氏), 안동장씨(安東張氏)의 집성마을이다. 금계 1리에 복당, 사망, 알실[知谷], 음지, 검제 등 5개 마을, 금계 2리에 경광, 마누이[晩雲], 텃골[基谷], 미리미, 작장골 등 5개 마을이 있다.『영가지永嘉誌』에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옛날부터 ‘천년 패하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했다. 사복정 배상지(裴尙志)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栢竹堂)이 있다.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판서 권예(權輗)도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라고 하였다.

변씨는 원래 신라시대부터 황주의 토호였는데, 변려(邊呂)의 후손 변순(邊順)이 원나라 사신 탈타아(脫朶兒)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심양의 천호가 되어 정착했다. 변순의 손자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이 1351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형부 상서로 노국공주를 배행해 고려로 왔다. 고려는 변안열을 삼중대광 문하찬성사 원주부원군에 봉했는데, 이로 인해 변안열은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변중일의 고조부 변희예(邊希乂)는 부사직을 지냈지만 무오사화 때 그의 종형 변희리(邊希李)와 영주에 정착해 불의에 항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증조부 변광(邊廣)은 1513년 생원시에 입격했으며, 영주에서 안동 금계로 이주해 안동의 입향조가 되었다. 조부 변영청(邊永淸, 1516~1580)은 목민관으로 ‘화산삼걸(花山三傑)’로 꼽히는 인물이다.

변중일의 부친은 변경장(邊慶長)이고, 모친은 동래정씨(東萊鄭氏) 정희순(鄭希舜)의 딸이다. 그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18세 때인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었으나 조모 이씨가 더위를 먹어 설사가 매우 심한 까닭에 피할 수 없었다. 변중일은 할머니를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포 소리가 요란한 끝에 왜적이 몰려오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해 했다. 변중일은 먼저 어머니를 업어다 빽빽한 삼밭 가운데 모시고 난 뒤 돌아와 할머니를 업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천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한 왜적이 돌입하여 때리며 끌고 가려 하다가 할머니가 땅에 엎어지자 칼로 베려 하였다. 이에 변중일은 “차라리 나를 죽이고 팔십 되신 조모를 살려 달라.”라고 간청하자, 여러 왜적들이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일으킨 뒤 얼굴의 흙을 털어 주며 들어가 시병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이만한 효성은 참으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이어 서로 돌아보며 의논하기를 “우리 군대의 발이 닿으면 자칫 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라고 말하고는 깃발 하나와 칼 하나를 변중일에게 주면서 신표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칼은 지금까지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 이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영남을 안찰하면서 진주 지역에서 초유(招諭)하고 있었는데 변중일은 형 변희일(邊喜一)과 진주로 갔으나 이미 김성일이 병사했다. 이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진중으로 들어가 활약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화왕산성으로 가서 다른 창의한 이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치기로 맹약했다. 만년에는 금계의 동쪽 언덕에 집을 짓고 간재라고 편액한 뒤 그것을 호로 삼았다. 뒤에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죽자 소식을 하고 복상하였다. 나이 팔십이 넘어 통정의 품계에 올랐다. 저술로 2권 1책의 『간재집簡齋集』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회동에 있다. 1686년 경상도 안찰사가 변중일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려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현재의 경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을 입구에 정충효각이 건립되었다.

간재종택과 간재정은 변중일 후손의 살림집과 변중일이 강학하던 정자이다. 이 건물들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초입에 위치하는데, 서후면의 진입로가 있는 송야사 거리에서 3㎞ 정도 가면 오른쪽에 작은 마을로 들어가는 농로가 있다. 이 농로를 따라 300m 정도 가면 간재종택이 있고 종택 뒷산 언덕 위에 간재정이 있다. 종가로 들어가는 들 사이의 비좁은 길은 그 중간 쯤에 홍살문을 세워두고 있다. 홍살문에서 종택 사이에는 작은 충효비각이 서 있다. 골짜기 맨 아래쪽에 남서향한 종택이 크게 일곽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그 뒤편 우측에 사당이 서향으로 놓여 있다. 사당 좌측 골의 맨 위쪽에 간재정이 남서향으로 자리한다. 종택은 1796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1949년 중수되었다. 간재정은 17세기 초중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1874년 중건하였다.

종택은 정면 6칸 반, 측면 5.5칸의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가옥의 평면은 ㅁ자형을 취하고 있으며, 사랑마당에서 볼 때 정면 우측에 있는 사랑채가 ㅁ자형의 평면에서 반 칸 돌출해 있다. 사랑채는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 위에 세워진 건물로 난간을 두른 누마루와 뒷면에 반 칸의 퇴를 내어 벽장으로 사용하는 2칸통의 사랑방,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반인 사랑마루 등으로 구성된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뒷면에 반 칸 퇴를 내어 2칸 반통을 사용하는 안방, 우측에 2칸통인 안사랑방이 있다. 안방과 면하고 있는 좌익사(左翼舍)는 부엌 1칸, 고방 1칸으로 배치되었으며 고방과 면하고 있는 중문간채는 뒷방 1칸과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인 반 칸의 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안사랑방과 면하는 우익사(右翼舍)는 부엌 1칸과 사랑채의 사랑마루와 면하는 1칸의 책방으로 되어 있다. 종택의 사랑채 전면 좌측에는 무민당(无憫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팔작지붕과 홑처마인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건물이 있는데, 좌측 2칸은 온돌방이고 우측 1칸은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 뒤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에 홑처마인 사당이 있다.

간재정은 원주변씨 간재종택 뒷산에 있다. 산을 깎아 평지로 만든 후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정자는 남향으로 종택을 바라보고 있으며 누각식으로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크기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홑처마로 되어 있다. 간재정의 전면 반 칸에는 난간을 두른 마루를 설치하여 누마루로 설치하였다. 누마루 전면 처마 밑에는 간재라고 써 있는 편액을 게첨하였다. 간재정은 2개의 온돌방과 1개의 마루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양쪽 협칸은 각각 온돌방이고 어간은 마루방이다. 마루방과 누마루는 완전히 개방되었으며 양쪽 온돌방에서 마루방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좌협칸에는 세살문 외여닫이문을 달고 우협칸에는 세살문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좌협칸 문 위에 간재중수기(簡齋重修記) 편액을 걸어 두었고, 우협칸 방문 위에는 간재기(簡齋記) 편액이 있다. 마루방 뒷벽에는 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누마루 아래로 양쪽 협칸 자리에 각각 아궁이를 설치하였으며, 방 뒤쪽에는 굴뚝을 설치하였다. 간재종택은 2003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변중일, 『간재집簡齋集』.
  • 변영청, 『동호집東湖集』.
  • 변효영, 『原州邊氏僉樞公派松河公宗會世譜』, 대보사, 2008.
  • 권진호, 「동호東湖 변영청邊永淸의 삶과 시세계」, 안동청년유도회 창립30주년 기념 학술강연회 16세기 안동지역의 문학과 학문 ‘화산 삼걸’을 중심으로 발표요지집, 2017.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