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추만구택(秋巒舊宅)

전주이씨 한산군파(全州李氏 漢山君派)

37.0x93.0x2.8 / 행서(行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추만구택(秋巒舊宅)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37.0x93.0x2.8
  • 건물명 추만구택(秋巒舊宅)
  • 공간명 전주이씨 한산군파(全州李氏 漢山君派)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 법전 풍정리
  •  
r0117_1.jpg
추만구택(秋巒舊宅)

추만구택(秋巒舊宅)


추만구택(秋巒舊宅)은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 있는 추만(秋巒) 이영기(李榮基, 1583∼1661)의 당호에 ‘구택’을 붙여 쓴 편액이다. 영모당(永慕堂)에 걸려 있는데, 영모당은 이영기가 선조의 위패를 모시고 영원히 선조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영기는 만년에 사덕정(俟德亭)을 지어 그 속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덕’은 이영기 자신은 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백대토록 이어질 덕을 갖고 있는 사람을 기다려 그들과 종유하겠다는 뜻을 갖고 있다.

편액의 좌단 말미에 있는 낙관을 보아 글씨는 남병호(南秉鎬)가 행서로 쓴 것이다. 네 글자를 크게 넣고도 여유가 있다. 치밀한 계산과 철저한 사전 준비가 있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튼튼한 필획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보는듯하고, 긴밀한 내부구성은 바람도 통하지 않을 듯 치열하다. 상대적으로 글자간 공간은 말을 달릴 듯 시원하게 트였다. 시작과 마무리의 필법에 고법을 충실히 따르고 방정함에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자형을 유지하면서도 창신을 실현한 면모를 보여준다. 글씨에 대하여 자부심이 가득하다. 그 마음이 든든하고 좋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전주이씨 한산군파(全州李氏 漢山君派) 소개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는 36번 도로의 아래쪽, 서쪽으로 창평, 동쪽으로 척곡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봉성·양곡·도천 등이 있다. 36번 도로를 타고 봉성 쪽에서 동행하면 다덕고개를 지나면서 풍정리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갈방고을이다. 갈방산 산록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갈뱅이라고도 하는데, 1940년대 다덕광산이 번성할 때 이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갈방마을의 아래쪽은 불미골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마을로 야동이라고도 불린다. 불미골의 아래쪽으로는 명창골이 있는데 명동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명청동이라고 하였다. 명월청풍에서 온 이름이다. 숙종 때 학자 이시선(李時善, 1625~1715)이 여기에 송월재(松月齋)를 짓고 머물렀다. 명창골에서 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동쪽으로 샛길이 만들어져 척곡 쪽으로 나간다. 그대로 남행하는 길은 삼거리를 지나서 시드물에 이른다. 풍정이라고도 하며, 풍정리의 본동이다. 마을 앞 냇가에 맑은 우물이 있고 우물 근방에 큰 신나무가 있어 시드물이라 한다. 우물가 바위에는 풍정이라는 글자가 명각되어 있다. 시드물의 서쪽에 있는 것은 엉고개이며 아현이라고도 한다. 그 서쪽으로 좀 떨어진 지점에 봉성역이 있다. 아현은 500년 전에 봉화금씨(奉化琴氏)가 개척하였다. 시드물의 남쪽으로는 가마고개가 있으며 부현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부고개촌이었다. 여기에는 1940년대 번창한 다덕광산의 광구가 여럿 남아 있다. 시드물의 남동쪽으로는 심수가 있으며 심새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는 원래 우물이 없어 냇물을 식용하였는데, 질병이 많이 생겼기에 여기 저기 샘을 찾다가 마을 한구석의 큰 향나무 밑을 파서 샘을 얻었다고 하여 심수라고 한다. 심수의 동남쪽으로는 돌다리 석교가 있다. 옛날 비가 와 냇물이 불었을 때 홍장군이라는 장사가 큰 돌을 놓아 딛고 건널 수 있도록 해서 돌다리로 불렸다. 시드물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면 노림이다. 노리미라고도 하며, 여기에 이영기의 영모당과 사덕정이 있다.

이영기의 자는 광선(光先), 호는 추만(秋巒),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우산군 이종(李踵)의 5대손이다. 용궁현감을 지낸 이성립(李成立)이 부친이며 모친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황윤규(黃潤奎)의 딸이다. 이영기는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 재상 유영경(柳永慶)과 이수광(李睟光)이 그를 보고서 “그릇이 커서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강원도로 피난했다가 서울로 돌아온 뒤 전염병으로 부모가 사망하여 당시 이모부 하동정씨(河東鄭氏) 정욱(鄭彧)이 안산에 있어 형 이창기(李昌基)와 함께 그곳에 의탁하였다. 이창기는 해주윤씨(海州尹氏) 윤정(尹霆)의 딸에게 장가들어 해주에서 살게 되었고, 이영기는 이모 황씨(黃氏)를 따라 1594년 외가인 풍기로 내려왔다. 이후 봉화 닭실의 충재 집안에 장가들어 춘양의 풍정리에 자리 잡은 이영기는 자기를 맡아 길러준 이모부에게 감사하여 그의 아들 정담(鄭燂)이 함창(咸昌)에 우거(寓居)할 때 풍정에 있는 자신의 논을 정담에게 주어 보답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서울에 있는 일가친척 100여 명이 그의 집으로 피난 오자 모두 수용하고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해주에 살던 형이 세상을 떠나고 그 가세가 기울어 제사를 지낼 수 없자 형을 포함한 3대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또 집 근처에 영모당을 지어 풍양에 우산군의 아들 한산군 이정(李挺) 이하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선조를 추모하였다. 만년에는 사덕정을 지어 그 속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영기의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래(權來)의 딸로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증손녀이다. 아들은 이시겸(李時謙), 이시함(李時咸), 이시항(李時恒), 이시선(李時善), 이시복(李時復)이고, 사위는 김훈(金薰)과 김계광(金啓光)이다. 묘는 예안의 건지산에 있다.

추만고택 편액이 있는 영모당은 마을 입구 쪽으로 나와 서 있는 사덕정, 그 안쪽으로 자리잡은 사당, 사당의 안쪽으로 있는 전주이씨 영모당, 그리고 제일 안쪽에 자리 잡은 안채 등 네 건물로 구성된다. 사덕정의 앞으로는 4각의 연못이 있고, 사덕정과 사당 사이에는 비각이 있다. 이 모든 건물들은 횡으로 일선으로 놓여 있다. 영모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정면 4칸의 양쪽 2칸은 방이고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이다. 앞에는 4칸 모두 반 칸 규모의 마루를 두고 있다. 마루의 양 측면은 나무판 문을 달았다. 이 앞마루 양편의 나무판 문과 마루방 뒷벽의 마루판 문은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서까래를 바친 횡보 밑에는 그것보다 조금 폭이 좁은 각재를 덧대어 횡보를 보강하였고, 그 아래는 틈목을 사이에 끼우고 다시 횡목을 놓았다. 이 횡목 아래로는 다시 두 뼘 정도 공간을 두고 횡목이 놓여서 아래쪽 나무판 영역을 형성한다. 횡목과 횡목 사이 두 뼘쯤 되는 영역은 각재 틀을 갖추고 그 안에 나무판을 끼워 넣었다. 나무판은 일선으로 여럿 이어져 있으며, 각 나무판마다 안상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대부분의 건물에서 안상은 난간의 아래편에 위치한다. 난간의 바닥면에서 보이지 않는 안상이 지붕의 아래쪽, 나무판 문틀 바로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 깔린 것도 아니고, 위로 올라붙은 것도 아니다. 머리 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이에 안상이 들어서는 것은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마루의 양쪽 측면에서도 똑같은 높이에서 안상을 볼 수 있다. 전주이씨 영모당의 좌우 측면 벽 아래 붙은 쪽마루에서는 이 안상 아래 나무판 문을 통해 앞마루로 들어갈 수 있다. 뒤편의 왼편 제1칸에서 제3칸까지는 동일한 높이의 쪽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뒷면 왼쪽에서 제4칸은 벽이 쪽마루 넓이만큼 뒤로 튀어나와 있다. 영모당은 2003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6호로 지정되었고, 사덕정은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이유장, 「처사전주이공행장處士全州李公行狀」, 『고산집』.
  • 이민구李敏求, 「용궁현감이공묘갈명龍宮縣監李公墓碣銘」, 『동주집東州集』.
  • 청량산박물관, 『봉화의 누정기』, 봉화군,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