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편액
  • 공간별 보기

선오당(善迃堂)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66.0x118.0x8.6 / 행서(行書)MORE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자료명 선오당(善迃堂)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66.0x118.0x8.6
  • 건물명 선오당(善迃堂)
  • 공간명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주시 평은면-간재종택
  •  
r0047_1.jpg
선오당(善迃堂)

선오당(善迃堂)


선오당(善迃堂)은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에 있는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종택인 간재(艮齋)종택의 별칭으로, 이덕홍의 장남 선오당(善迃堂) 이시(李蒔, 1569~1636)의 호이기도 하다. ‘선오’는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며, 사마천의 『사기』, 「맹가전孟軻傳」에 “양혜왕이 맹자를 등용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멀고 세상 실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 ‘오(迃)’와 ‘우(迂)’는 통하는 자이다. 스스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문을 닫고 학문에 심취하고자 하는 선비다운 겸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편액의 글씨는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8)이 쓴 행서이다.

행서의 리듬과 흐름이 활달한 행서 편액이다. 그러나 필획에 마무리가 분명하고 자간의 공간 간격도 균일하여 자체는 흐트러짐없이 단정하다. 흥취가 있으나 지나치지 않았고 절제미가 있으나 감추지 않았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글귀는 세상을 통찰하는 선비의 한갓 겸사임을 알겠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소개


영천이씨(永川李氏) 간재종택은 고려 초기 영천 출신 평장사 이문한(李文漢)의 후손이다. 고려 말 군기시소윤을 역임한 영천 출신의 낙은(洛隱) 이헌(李軒)이 1350년(충정왕 2) 경에 예안의 부내[汾川]를 지나가다 수려한 산수에 반해 이거하였다. 입향조 이헌은 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이파(李坡)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흥현감을 지냈다. 그의 외손녀가 노송정 이계양의 배위이니, 곧 퇴계 이황의 조모이다. 따라서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은 7촌의 인척이 된다. 둘째 이오(李塢)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직제학으로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손녀사위가 되었고, 관찰사 금숙(琴淑)과 사돈관계였다. 이파의 아들로는 이효손(李孝孫)과 이성손(李誠孫)이 있다. 이효손은 봉례를 역임하였으며, 이효손의 첫째 이흠(李欽)은 인제현감을, 둘째 이균(李鈞)은 직장을 지냈다. 이흠의 장남이 바로 청백리에 관리로 뽑혔고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이다. 이흠의 차남인 광헌(廣軒) 이현우(李賢佑)가 분천(汾川) 상류에 있는 천사(川沙 일명 내살미)로 이거하였고, 이현우의 아들 이충량(李忠樑)이 나주박씨(羅州朴氏) 박승장(朴承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영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이후 이충량의 넷째 아들인 간재 이덕홍이 만년에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 오계에 정사를 짓고 은거함으로써 오계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이덕홍의 자는 굉중(宏中),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1541년(중종 36) 영주 구룡동(지금의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녹동)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0여 세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여 자식처럼 사랑을 받았다. 모든 학문에 뛰어났는데, 특히 역학에 밝았다. 1578년(선조 11)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위시해서 9명의 명사가 조정에 천거되었는데, 이덕홍은 그중에 네 번째로 뽑혀 집경전참봉에 임명되었다. 종묘서직장과 세자익위사부솔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세자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영춘현감으로 나아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덕홍의 장남이 바로 선오당 이시이다. 그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 본관은 영천이다. 1569년(선조 2) 오천 본가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매우 뛰어나서 13~14세에 이미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였고 한강 정구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학문의 외연을 넓혔다. 일찍이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어지러운 과장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만년에 부친이 경영하던 오계정사가 훼손되자 이를 쌍계마을로 옮겨 오계서당이라 이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학자들을 길러 내었다. 그의 학행을 흠모하여 인근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는데, 스승 한강 정구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찾아와서 제자를 가르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가학이 이어지는 것을 칭송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36년(인조 14)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사복시부정에 추증되고 1724년(경종 4) 오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선오당일고善迃堂逸稿』가 있다. 그의 글 중에서 사람이 순풍에 돛을 단다면 험한 길도 쉽게 갈 수 있지만, 잘못하여 폭풍우를 만나면 배는 뒤집히고 사공은 익사한다는 내용의 국조시조 「조주후풍操舟候風歌」가 유명하다.

선오당이 있는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는 조선시대 말 예안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당리·어리·길명리, 영주군 천상면 오천동, 봉화군 임지면 구천리의 일부가 통합되어 원천동으로 개편되고 안동군 녹전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군이 안동시와 통합되면서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가 되었다. 마을 뒤에는 복두산이 솟아 있어 골짜기가 많고 앞으로는 상운천과 용각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농촌 마을이다. 선오당(일명 간재종택)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자형 와가이다. 안채 중앙에 2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좌우익사에는 부엌과 방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좌측에 1칸 반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는 대청마루를 두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이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은 이덕홍의 손자인 이영전(李榮全)의 정자로 당호는 청천와이다.

참고문헌
  • 남재주, 「오계서원」 『안동의 서원』, 안동청년유도회, 2016.
  • 『안동의 현판(상)』, 안동민속박물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