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書巢)
서소(書巢)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김종휴(金宗烋, 1783∼1866)의 서재 편액이다. 서소의 의미는 ‘글 둥지’라는 뜻으로 서재(書齋) 혹은 서실(書室)의 의미와 같다. 서소라는 명칭은 중국 남송(南宋) 때의 시인인 육유(陸游, 1125~1210)가 자신의 서재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책을 두루 섭렵하고자 하는 의지도 내포되어 있다.
풍산김씨 학사종택(豐山金氏 鶴沙宗宅) 소개
김종휴의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성호(聖浩). 호는 서소(書巢)이다. 1822년에 생원시에 합격 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천원재를 지어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결과 그의 제자 가운데서 대소과에 합격한 사람만도 30명이 넘을 정도였다. 8~9세에 이미 『소학』을 비롯하여 『대학』, 『논어』, 『효경』 등의 책을 통달하였고 11세에 1년여에 걸쳐서 천연두를 앓으면서도 거의 1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읽어 경전과 제자백가의 글 대부분 이해하였다. 병으로 씨름하면서도 책을 곁에 두고 읽을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는 태도와 그 자질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그의 문집인 『서소집』은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소(疏) 3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사도세자의 두 번째 환갑을 맞아 사도세자에게 휘호를 내려 달라는 소를 청한 것과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글, 그리고 자신의 10대조(祖)인 잠암(潛庵) 김의정(金義貞)의 시호를 내려 달라고 청하는 글들이 있다. 특히 이 상소들은 영남사림을 대표하여 쓴 것들로, 당시 영남사림에서 선생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잡저인 「관서차의觀書箚疑」에는 『대학』‧『중용』‧『논어』‧『맹자』‧『시경』‧『주역』의 내용을 읽다가 의심이 나는 항목들을 기록하였다. 경전 외에도 도연명의 「무릉도원기武陵桃源記」에 대한 의문점도 함께 실려 있다. 의문의 내용은 다양하여 글자의 해석에 관련된 부분이나 판본의 문제, 현토, 소주(小註)의 해석에 대한 의문, 그리고 경전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거나 어긋나는 부분 등에 대한 세밀한 의문들이 기록되어 있다. 도연명의 글에 대해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허실(虛失)에 대한 의견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특히 저자의 성리학적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주석과 본문의 해석이 갖는 불일치에 대해 대단히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잡저 가운데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에 대해 전체를 13개 조항으로 나누고 각 단락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관서차의」와 더불어 저자의 성리학적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또한 「갑오척사변」은 월천 조목이 척화론의 입장에 서서 서애 류성룡을 주화론자로 비판했던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으로 김종휴의 논리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글이다. 나아가 「동정록東征錄」은 유람기로 관동 지방의 풍경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대단히 가치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사마천이 『사기』에서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설에 대해 『서경』‧『주역』‧『논어』 등의 경전을 이용해서 『사기』를 편찬할 때 야사를 잘못 인용한 것이라고 비판한 「무왕봉기자우조선론武王封箕子于朝鮮論」도 함께 실려 있다. 주나라를 성인의 나라로 인정하면서 그와 관계성을 가지는 것을 중시했던 당시의 일반적 입장에 비해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더 중시하고 있어 주목이 되는 작품이다. 오미동의 풍산김씨(豊山金氏)는 고려 중기 인물인 김문적(金文迪)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안동에서 지주적 기반을 형성하게 된 배경은 김안정(金安鼎)의 둘째 아들인 김자순(金子純)이 안동 풍산 오릉동(지금의 오미동)에 살기를 정한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순의 후손들은 이후에도 사환으로 서울에 거주하였는데, 허백당 김양진이 오릉동을 자주 출입하였다가 그의 아들 잠암 김의정이 을사사화 이후 안동으로 완전히 낙향하여 오릉동을 오무동으로 바꾸어 정착함으로 인해 명망세족으로 성장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런데 정치적 환멸을 느낀 그는 아들에겐 벼슬하지 말고 농사나 지으면서 살라는 의미로 이름조차 ‘농(農)’으로 바꾸었다.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은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시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캐노니 저 멀리 아득히 남산이 보이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취하여 이웃 마을에 사는 김윤안(金允安)과 서로 호를 나누어서 김윤안은 동리(東籬)라 하고 김대현은 유연당이라 자호하기도 하였다. 김대현은 아홉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여덟째 김술조(金述祖)는 요절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1572~1630)·망와(忘窩) 김영조(金榮祖, 1577∼1648)·장암(藏庵) 김창조(金昌祖, 1581~1637)·심곡(深谷) 김경조(金慶祖, 1583~1645)·광록(廣麓) 김연조(金延祖, 1585~1613)·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학음(鶴陰) 김염조(金念祖, 1589~1652)·설송(雪松) 김숭조(金崇祖, 1598~1632)이다. 특이하게도 8형제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들 중 5형제(봉조·영조·연조·응조·숭조)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을 오무동에서 오미동으로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라는 문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미동의 풍산김씨는 미김(美金)으로 불리며 명망 있는 재지사족으로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8형제는 모두 현달하여 학호파·망와파·장암파·심곡파·광록파·학사파·학음파·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파조를 이루었다. 8형제 가운데 김봉조·김경조·김숭조는 그대로 오미리에 세거하였고, 김영조·김창조·김응조는 영주에 살다가 그 후손들 중 제주목사를 지낸 노봉(蘆峯) 김정(金伯政, 1670∼1737)이 1696년(숙종22) 오전리에 살고 있던 삼종형(三從兄) 김성(金伯星, 1661~1724)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풍수가 너무 좋아서 오록에 터를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김연조의 후손들은 예천 벌방리에 터전을 잡았으며 김염조는 재종숙 둔곡(遁谷) 김수현(金壽賢, 1565∼1653)에게 출계(出系)하여 경기도 파주로 이거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서소선생문집』 상세해제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Ⅱ,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민심을 보듬고 나라를 생각하며』, 제10회 기탁문중 특별전(풍산김씨 허백당 문중),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