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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鷦棲)

영양남씨 영해 시암고택(英陽南氏 寧海 時庵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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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초서(鷦棲)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6.0x61.0x3.9
  • 건물명 초서(鷦棲)
  • 공간명 영양남씨 영해 시암고택(英陽南氏 寧海 時庵古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덕군 영해 원구리 2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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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서(鷦棲)

초서(鷦棲)


초서(鷦棲)는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시암(時庵)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서판(書板)이다. 내용은 시암(時庵) 남고(南皐, 1807~1879)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소박하지만 분수에 맞는 삶을 표현하였다. 대붕(大鵬)은 구만리를 날아가는 반면 뱁새[鷦]는 작은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며 지낼[棲] 뿐이다. 하지만 작은 나뭇가지 사이에서 사는 뱁새처럼 남고 자신도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서판의 내용인 「초서기鷦棲記」는 『시암집時庵集』에 실려 있는데, 1841년에 지은 것으로 『주역』의 「괘수卦數」와 일치시켜 64자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남고는 『주역』을 읽고 자신의 호를 시암(時庵)으로 정할 정도로 『주역』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숨겨져 왔던 이곳에
십 년 동안 집 지으려 생각했네
우연히 작은 집을 하나 지으니
평생의 뜻을 헤아리기에 충분하네
푸른 산이 헌함처럼 둘러 있고
폭포 소리는 집에까지 들려오네
거문고와 책으로 말년을 보내니
이 즐거움 누가 나만 하겠는가?

慳秋千年地
經營十載情
偶然成小屋
亦足度平生
翠嶂當軒擁
飛泉入戶鳴
琴書聊自老
此樂有誰爭

초서가 어떠한 공간을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남고가 평소 지내면서 강학을 했던 곳의 당호로 보인다. 남고는 16세(1822년)에 결혼을 하면서 분가했는데, 이때 시암고택을 매입해 살았다. 20세부터 대둔산에 정자를 세울 계획이 있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실행하지 못했다. 22세에 화공에게 의뢰해 자신이 희망하는 대둔정사(大遯精舍)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다 38세에야 비로소 화폭에 담은 모습과 비슷하게 정사를 짓고 위 시를 지어 분수를 지키며 소박하게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이상 남고의 시암고택 매입시기(16세 이후)와 「초서기」의 제작 연도(36세), 대둔정사의 창건 연대(38세)를 살펴보면 초서는 실제 시암고택의 당호이며, 대둔정사는 남고가 추구한 초서의 이상향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글씨는 남고의 스승인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그의 나의 80세인 1856년경에 썼다고 현판 왼쪽에 부기(附記)되어 있다. 해서체로 쓰였다.

‘뱁새가 깃드는 곳‘ 이라는 초서(鷦棲)라고 자신의 방 이름을 스스로 짓고 쓴다. 붕새가 아닌 뱁새라는 것은 물론 겸사의 뜻이다. 누실(陋室)과도 통한다. ’초료의 세상은(鷦鷯之飛) 나뭇가지 사이에 불과한데도(不過楡枋之間) 스스로 즐기며(亦自樂) 다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而無求)‘ 자신이 지은 당호에 대한 해설(銘)에 나온 말이다. 해설도 함께 작은 글씨로 편액에 새겨 넣었다. 80세에 정재(定齋) 본인이 쓴다고 적었다. 반듯한 필획 하나하나가 서릿발처럼 다가온다. 때로 글씨는 자신을 드러내는 매개물에 불과하다.

‘뱁새가 깃드는 곳‘ 이라는 초서(鷦棲)라고 자신의 방 이름을 스스로 짓고 쓴다. 붕새가 아닌 뱁새라는 것은 물론 겸사의 뜻이다. 누실(陋室)과도 통한다. ’초료의 세상은(鷦鷯之飛) 나뭇가지 사이에 불과한데도(不過楡枋之間) 스스로 즐기며(亦自樂) 다른 것을 구하지 않는다(而無求)‘ 자신이 지은 당호에 대한 해설(銘)에 나온 말이다. 해설도 함께 작은 글씨로 편액에 새겨 넣었다. 80세에 정재(定齋) 본인이 쓴다고 적었다. 반듯한 필획 하나하나가 서릿발처럼 다가온다. 때로 글씨는 자신을 드러내는 매개물에 불과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영양남씨 영해 시암고택(英陽南氏 寧海 時庵古宅) 소개


경상북도 영해면 원구리는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영해부 남면에 속한 지역으로 원고(元皐)라 하였으며, 1895년의 관제 개편으로 영해부가 영해군이 되었을 당시에 묘곡면의 지역으로 원구(元邱)라 하였다. 또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 하여 뚜들로 불렀으며, 이를 또한 원두들, 또는 원구, 원파라 하였다. 이후 원구리는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상동, 원중동, 원하동, 옥금동을 병합하여 원구동이라 하고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에 원고동을 원구 1동, 옥금을 원구 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88년에 동이 리로 개칭되었다.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영해에 정착한 것은 신라 경덕왕 시절부터이다. 당나라 여남 출신의 김충(金忠)이 천보(天寶)년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표류하여 영해의 축산에 닿았다. 이에 경덕왕이 당나라에 알리자 당 현종이 조서를 내려 그곳에 살게 했다. 이에 경덕왕은 김충에게 영양을 식읍으로 주고 남씨로 성을 내렸으며, 이름을 민(敏)으로 고쳤다. 이후 후손들이 영양과 영해 등지에서 살았으며, 남고의 12대조인 남한립(南漢粒)이 울진에서 영해면 원구리로 이거하면서 영양남씨가 원구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남고는 초명이 남택환(南宅煥)이며, 초자(初字)는 중안(仲安)이다. 부친과 맏형이 일찍 세상을 뜨자 이름을 고(皐)로, 자는 중원(仲元)으로 바꾸었다. 호는 시암(時庵) 또는 둔암(遯庵)이며, 본관은 영양이다. 부친은 남유로(南有魯), 모친은 대흥백씨(大興白氏) 백원옥(白元玉)의 딸이다. 15세(1821년) 정월초하루에 「원조십오잠元朝十五箴」을 지었는데, 어린 나이부터 수신할 때의 경계를 알았다. 26세(1832년) 때 안동의 운대에서 시행한 강연에 참가해 이휘일(李徽逸)과 이현일(李玄逸)이 편한 「홍범연의洪範衍義」를 여러 책과 비교하여 차이나는 것을 의견 내어 바로잡았다. 남고는 30세(1836년) 때 퇴계학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에게 수학하여 학문이 높고 해박하였다. 그래서 해방사표 시암선생(海邦師表 時庵先生)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뒤 34세(1840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8세가 되어 대둔산에 20세부터 계획했던 대둔정사를 건립하였다. 44세에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뒤로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 양성에만 힘썼으며, 1861년 류치명의 유고(遺稿)를 수습해 문집 편찬을 위한 교정에 참여하였다. 1879년에 세상을 떠나 영해 벽수동(碧水洞)에 묻혔다. 초취부인인 안동김씨 김관진(金寬進)의 딸은 자녀를 두지 못하고 혼인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재취부인인 청송심씨(靑松沈氏) 심헌지(沈憲之)의 여식 사이에는 1녀를 낳았고, 삼취부인인 안성이씨(安城李氏) 이서린(李瑞麟)의 딸 사이에 아들 남효술(南孝述)과 사위 권상여(權相輿)를 두었다. 1900년 아들 남효술 등의 주관으로 15권 8책의 『시암집時庵集』이 간행되었다.

시암고택은 남진만(南震萬, 1697~1773)의 살림집이던 건물을 그의 5대손 남교성(南敎成)이 친족인 남고에게 매도한 것이다. 남고는 결혼 후 분가하면서 이 집을 구해 크게 중수하였다. 건물은 정침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의 홑처마 지붕이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다. 가구는 3량가로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었으며, 사방에 기와 담장을 둘렀다. 2010년 6월 10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76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남고, 『시암집時庵集』.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