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이씨 주촌문중(眞城李氏 周村門中)
두루종택 문중은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의 후손이다. 이석은 대대로 경상도 진보현(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에 살았던 향리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죽은 뒤 밀직부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자수(李子脩)와 이자방(李子芳) 두 아들을 두었다. 이석의 맏아들 이자수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1363년(공민왕 12) 개경을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구의 침략을 피해 진보에서 안동 마애로 옮겼다가 만년에 다시 지금의 예안 두루(주촌 周村)로 옮기면서 두루마을 입향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두루종택 문중은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히 구축함과 동시에 급속한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다.이자수의 손자 이정(李禎)은 뛰어난 무예로 세종 때 북방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변경 지방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건주위 추장 이만주(李萬住)가 변경을 위협하자, 이자수는 영변판관에 발탁되어 부사 조비형(曺備衡)을 도와 약산성(藥山城)을 축조하여 영변에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데 공적을 남겼고, 또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를 정벌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는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명망을 얻었다. 나아가 여섯 명의 딸을 남백경(南伯庚)·유봉수(柳鳳壽)·정보문(鄭普文)·이주(李疇)·박근손(朴謹孫)·권종(權悰)에게 출가시켜 폭넓은 혼맥을 형성함으로써 가문이 향촌사회에서 재지적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이정은 이우양(李遇陽)·이흥양(李興陽)·이계양(李繼陽, 1424~1488)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이우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대로 예안 두루에 살면서 진성이씨 주촌파를 형성하였고, 그의 후손들 역시 두루를 무대로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둘째 이흥양은 증조부 이자수가 진보에서 처음 이거하였던 안동 마애로 옮겨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였다. 막내 이계양은 예안의 온계리에 정착하여 진성이씨 온혜파를 형성하여 재지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고, 그의 손자대에 와서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와 퇴계 이황이 출현함으로써 진성이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한편, 이우양의 증손자 이연의 자는 호연(浩然), 호는 경류정(慶流亭)이며, 부친은 이훈(李壎)이다. 그는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어른의 풍모가 있었으며, 정9품 벼슬인 훈도를 역임하였다.경류정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91호로 지정된 안동 진성이씨 종택인 두루종택 본채 왼쪽에 있다. 금학산 기슭에 자리한 남향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서쪽은 4칸 마루방이고 동쪽은 뒤쪽의 반침까지 포함하여 2칸통 온돌방이다. 자연석 초석 위에 배흘림이 강한 원주를 세운 겹처마 집으로 원주에는 배흘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앞쪽에 이정이 심었다는 600여 년 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는 종택의 상징이 되었는데, 향나무의 변종으로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는 듯한 형상이다. 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가지가 수평으로 퍼져 나가며 1.5m 높이에서 다시 사방으로 퍼진 줄기들의 지름이 13m나 된다. 용산(龍山) 이만인(李晩寅, 1834~1897)의 「경류정노송기慶流亭老松記」에 따르면 이정은 평안북도 영변에 거진을 설치하고 약산성을 쌓는 대역사 감독을 무사히 마치고 귀향하는 길에 약산의 뚝향나무 세 그루를 가지고 왔다. 그중 하나는 본가인 두루종택에 심고, 다른 한 그루는 막내아들 이계양이 온혜에 터를 잡을 때 주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사위 박근손 집에 심게 했다고 한다.작산정사 및 가창재사는 진성이씨 가문의 재사 및 정사로, 1980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작산정사는 1480년(성종 11) 송안군 이자수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손의 학문 연구를 위해 이황(李滉)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하였으며, 가창재사는 이정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같은 해 함께 건립되었다.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89번지에 위치하는데, 이곳을 흔히 ‘절골’이라 부른다. 작산지라는 작은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농로를 따라 마을에 접근해도 골짜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솔숲 때문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이다. 절골에서 터 앞을 흐르는 물이 빠져 나가는 방향이 보이지 않도록 수구막이로 조성한 솔숲을 지나면 양지바른 산기슭이 나오고 언덕 여기저기에 큰 바위와 고목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로 고색창연한 집 다섯 채가 자리한다. 동쪽으로는 구강당과 주사로 들어가는 길이, 서쪽으로는 작산정사와 사당을 거쳐 가창재사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수기重修記」에 따르면 가창재사는 1480년 처음 지어진 이래 여러 번 중수를 하다가 누각을 새로 얹은 것은 1715년(숙종 41)에 와서다. 지금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아마 철종 때인 1862년(철종 13)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장장 200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이다. 무첨재가 있는 구강당은 기울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정면 5칸 중 가운데 3칸은 마루이다. 동쪽 방은 비해재(匪懈齋), 서쪽 방은 무첨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이만인, 「경류정노송기」, 『용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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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편액Ⅱ』, 한국국학진흥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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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천근, 『안동의 종가』, 지식산업사, 2001.
- 윤천근,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 디지털안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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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성호, 「41, ‘진성 이씨의 정원’ 가창재사」, 동아일보, 2012년3월28일(http://news.donga.com/3/all/20120327/45095783/1#csidx83534fa79be3271b89a27a67cc76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