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晉州姜氏)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강각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오(敬吾), 호는 도은(陶隱)이다. 증조부는 강억(姜億), 조부는 강덕서(姜德瑞)이고, 부친은 금부도사를 지낸 강윤조(姜胤祖)이다. 잠은 강흡이 그의 큰형이다. 강각은 1620년(광해군 12) 경기도 교하에서 태어나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인조 14) 17세의 젊은 나이에 부모를 모시고 맏형 강흡과 함께 안동부 춘양현 법전촌으로 이거하였다가 병자호란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터를 잡고 살았다. 그는 대명의리를 실천하고자 청나라가 있는 북쪽으로는 창도 내지 않았으며 심지어 청나라 달력인 시헌력을 책상에 두지 않았다. 문 밖에는 대명홍(大明紅)과 연명국(淵明菊) 몇 포기를 심어 대명의리의 뜻을 지켰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우국충정의 정신 또한 남달랐다. 형 강흡과 함께 효제충신의 도의를 몸소 실천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형제애를 대련(大連)과 소련(小連) 형제의 행위에 빗대어 칭송하였다. 1816년에 영남사림에서 그의 덕행을 조정에 올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때 내려진 교지에는 강각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존중하여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죽을 때까지 자정(自靖 은거하며 뜻을 세워 몸을 깨끗이 함)하였으며 충절이 뛰어났다. [守義皇朝 沒身自靖 忠節卓異]”고 12글자가 써 있었다.강찬(姜酇)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진(子鎭), 호는 성건재(省愆齋), 아버지는 강각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욱(洪勗)의 딸이다.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3세에 어머니마저 잃어 백부인 강흡(姜恰)에게 길러졌는데, 백부모를 친 부모처럼 모심에 백부 강흡이 “내 아우가 죽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태백오현의 한 사람인 포옹(抱翁) 정양(鄭瀁)에게 『소학』을 받아 깊이 체득하고 힘써 행하였다. 나중에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는데, 윤증이 칭찬하기를 “나이가 많은데도 강문(講問)을 그만두지 않고 조존성찰(操存省察)을 게을리 하지 않는구나!”라고 매우 감탄하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우며 겸손하고 공손하며 자상하고 화락하였다. 양친을 일찍 여의고 늘 어버이를 사모하며 비통함에 스스로 죄인이라 일컬으며 부모님 말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 기제사가 있으면 보름 전부터 잔치에 가지 않았고, 제삿날에는 슬퍼함이 초상 때와 같이 조석으로 죽만 먹으며 떡과 과일을 먹지 않았다. 생일에도 슬픈 낯빛으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집안사람이 술과 음식을 차리면 물리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부모 없이 생일을 맞이하면 비통함을 배로 하라고 고인들이 일깨워 주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천지간에 죄인이거늘 술과 음식을 차려 손님들을 모아 놓고 즐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1727년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자 “내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구차하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직분에 넘치는 직책을 내려졌다고 내 마음에 애통해 여기던 것을 어찌 이것 때문에 기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노년에도 조상 묘소에 성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는데 자제들이 그만둘 것을 권하면 “내 나이 이미 늙어 제사에 참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늘 거동할 만한 몸으로 어찌 빠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강찬은 우리나라 제현들의 문적을 분류별로 모아 『현인문적賢人文蹟』 3권을 만들었다. 그의 문집 중 「서시아배書示兒輩」는 학문을 하다가 의문처가 있으면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알아야 된다는 것과 밤을 새워가며 글을 읽으면 건강에 해로우니 적당한 수면을 취할 것 등 7개항을 지시한 글이다.강명규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세응(世應), 호는 유계(柳溪) 또는 정눌거사(精訥居士)이다. 아버지 백와(白窩) 강필경(姜必敬)은 효도와 우애가 깊고 행실이 곧아 마을에서 높은 신망을 받았으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사민(思敏)의 딸이다. 태어나기 전날 밤에 족대부인 강색(姜??, 1739~1817)이 하늘로부터 흰 용이 내려와 울타리에 부딪히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사람들은 어질고 사리에 밝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외조부 운계(雲溪) 권사민(權思敏)은 감식안이 있어 “이 아이의 행동거지가 떳떳함이 있으니 뒷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명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잠심하여 제자와 백가까지 탐독하여 문장을 성취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잘 섬겼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덕성을 높이는 공부에 전념했고, 강운(姜橒)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특히 『주자전서朱子全書』 읽기를 좋아하였다. 한때 스승 강운의 권유에 따라 과거 공부도 한 바 있었으나 28세 이후로는 과거를 포기하고 스스로 정눌거사라 칭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스승을 따라 의양의 춘풍루에 가서 학문을 토론하고 문답하였는데 문하생들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1836년(헌종 2)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하자 가재를 털어 곤궁한 친척을 구제에 힘썼는데 자신도 굶주려서 몸이 여위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1841년 성재정사를 중수하여 지방 수재들의 교육에 힘썼다. 1852년(철종 3)과 1861년에 지방 관리로 추천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1855년 윤선거(尹宣擧)와 아들 윤증(尹拯)의 추탈(追奪) 사건에 항의하여 소를 올려 저지운동을 펼쳤다. 또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는 척사(斥邪)할 것을 호소하였다. 평생에 실행하지 않고 말만하는 인사를 싫어했고, 모든 행동에는 공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학문을 깊이 연구하고 의를 실천함으로써 세인의 추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네 명의 아들을 두어 종파의 번성을 꾀함으로써 5부자는 법전 문중의 기반을 다졌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0호인 도은종택은 강각이 병자호란 후 1639년(인조 17)에 관직을 사퇴하고 태백산 아래 법전 양지마을에 결이 고은 홍송으로 살림집을 지으며 도은구거(陶隱舊居)라 이름 지었다. 1675년(숙종 1) 강각의 장자 성건재(省愆齋) 강찬(姜酇)이 안채를 지은 이후 1722년(경종 2)경 도은종택 우측에 온돌방 2칸과 대청 1칸으로 구성된 건물을 다시 지었다. 1860년(철종 11)에 도은 강각의 7대손인 유계 강명규가 중수하였으며, 1982년에는 후손들의 성금과 봉화군의 지원을 받아 중수하였다가 201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현재 안채, 사랑채, 재청, 큰 사당, 작은 사당이 잔존하여 있다. 안채는 산돌로 높직하게 댓돌을 쌓고 그 위에 지어서 매우 훤칠해 보인다. 배치는 ‘ㅁ’자형이며 정면 5칸, 측면 4칸의 구성으로 중앙에 정면 3칸의 대청이 있다. 앞 기둥은 둥근 나무로 만들었는데 약한 배흘림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집이다. 대청 좌측에 윗방, 안방, 부엌 순으로 배열되고 우측에 고방, 작은사랑방과 계자각을 두른 누마루가 계속된다. 사랑채에는 문간과 문간방, 고방, 그리고 사랑방과 마루, 툇마루 순이며 툇마루에는 난간을 설치하였다. 정면 5칸 반, 측면 1칸의 규모이다. 재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이다. 2칸의 구들과 마루방 1칸, 앞쪽을 3칸 마루가 차지하고 있는데 난간을 둘렀다. 5량집의 가구이고 기둥 위로 삼포를 얹었는데 원래 구조가 아니라 후대에 개조하였다.
참고문헌- 강명규姜命奎, 「유계정사기柳溪精舍記」, 『유계집柳溪集』 권5.
- 윤광소尹光紹, 「처사강공묘지명處士姜公墓誌銘」, 『소곡선생유고素谷先生遺稿』 권6.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
- 「행장行狀」, 『성건재선생유고省愆齋先生遺稿』 권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