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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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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 주소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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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관련편액 성재(惺齋)

봉화금씨 관찰공파(奉化琴氏 觀察公派)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는 예안현에 속했던 역원 부라원이 있어서 ‘부라리’로 불렸다. 구한말에는 예안군 동하동 지역이었으나, 1914년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부포리로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부포리에는 호군(護軍)인 권간(權簡)이 그 전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살기 시작하였고, 조금 뒤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 부포리는 수몰되기 전 100여 호가 사는 마을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했고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하였다. 현재 부포리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虎嘯谷],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다.

역동마을은 처음 화왕촌이라 불렀으나 후에 북계라고 고쳤으며 다시 역동으로 불렀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선성지宣城誌』의 「북계사적北溪事蹟」 조에서 찾을 수 있는데, 1570년 이황의 발의로 이 마을의 오담(鰲潭) 가에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을 기리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면서부터이다. 역동서원은 1868년 훼철되었으나 1966년 복원되어 현재 안동대학교 안에 있다. 호사골은 『선성지』, 「부라사적浮羅事蹟」에 보면 호소곡(虎嘯谷)으로 표기하였으며, 마을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선성지』의 기록처럼 호소곡은 길고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호사골, 호수골, 호소골 등으로 부른다. 호랑이가 나와서 때때로 울었다고 하여 호소곡이라 했다는 구전과 마을 입구에 맹호등(猛虎嶝)이란 산이 있어서 호소곡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호사골 아래에 있는 못안마 위에는 임경대가 있다. 의촌리로 가는 도로변에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종택이 있으며, 길 건너 아래에 그의 정자인 성재가 있다. 임경대는 성재 앞을 흐르는 동계(東溪) 가의 바위를 말하는데, 바위의 전면에 ‘임경대(臨鏡臺)’와 ‘활원당(活源塘)’이란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다.『선성지』의 기록을 보면 “주인은 현감 금난수인데 새로 정사를 지어서 자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퇴계 선생께서 이곳에 유람하시고 인해서 대(臺)와 당(塘), 재(齋)의 이름을 지었는데, 재는 성성(惺惺)이요, 당은 활원(活源)이며, 세 개의 대 중 첫 번째는 임경(臨鏡), 두 번째는 풍호(風乎), 세 번째는 총춘(摠春)이며, 또 각처에 모두 시(詩)가 있다.”라고 하였다.

봉화금씨(奉化琴氏)의 시조는 삼한벽상공신 금용식(琴容式)이다. 그의 12세손 금숙(琴淑)은 금난수의 고조부이다. 봉화금씨는 대대로 봉화에 세거하였는데, 금숙이 봉화에서 예안으로 옮겨와 살면서 예안에 봉화금씨가 세거하게 되었다. 금난수의 증조부는 금증(琴嶒), 조부는 금치소(琴致韶)이다. 부친은 금헌(琴憲)이고, 모친은 영양남씨(英陽南氏) 남식(南軾)의 딸이다. 부인은 횡성조씨(橫城趙氏)는 참판 조대춘(趙大春)의 딸이자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동생이다. 금난수는 임천서당(臨川書堂)에서 강학하던 청계(靑溪) 김진(金璡)에게 수학하면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具鳳齡),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었고, 처남인 조목의 권유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금난수는 특히『심경』을 가장 좋아했는데, 이황에게 직접 전수 받아 강학에 힘쓴 책으로 전해진다. 금난수가 1554년 현 성성재종택 아래쪽 동계(東溪) 가에 성재를 신축하자 이황이 직접 편액을 써 주었고, 임경대(臨鏡臺), 풍호대(風乎臺), 총춘대(總春臺), 활원당(活源塘) 등의 이름도 직접 지어 주었다.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해 제릉참봉, 집경전참봉, 경릉참봉 등을 역임하였다. 1563년에는 가송협에 고산정을 지어 독서를 하며 자연과 벗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를 보양하기 위해 은거하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성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599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어 그 다음 해에 사직하고 귀향했다. 금난수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금경(琴憬), 금업(琴??), 금개(琴愷), 금각(琴恪)이고, 사위는 이광욱(李光郁)이다. 측실에게서는 아들이 둘 있으니, 금서(琴서)와 금운(琴惲)이다. 저술로 4권 2책의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단천리에 있다. 1605년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1709년 예안의 동계정사에 제향되었다.

성재는 부포마을 초입에 금난수의 종택인 성성재(惺惺齋)종택 앞의 동계 가에 있다. 건물은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각주를 세운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우측에 1칸의 온돌방을 두고 좌측 2칸은 마루로 꾸민 一자형 정자이다. 마루는 삼면에 판벽과 분합문을 설치하였으며 좌우 측면에는 툇마루를 붙였는데 비를 맞지 않도록 맞배 아래로 작은 지붕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 금난수琴蘭秀, 『성재집惺齋集』.
  • 국역선성지발간추진위원회, 『(國譯)宣城誌』, 국역선성지발간추진위원회, 1993.
  •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 편집,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디지털안동문화대전(http://andong.grandcultur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