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괴시파 영감댁
남흥수(南興壽, 1813~1899)의 자는 치유(穉猶)이고 호는 호은(濠隱),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증조는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된 기형(紀衡)이고, 조부는 택만(澤萬)인데 호는 물소와(勿小窩)이며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경괄(景适)이고, 어머니는 영천이씨 기응(箕應)의 딸이다.
유년 시절에는 종형인 해산(海山) 남기수(南箕壽, 1788~1837)에게 학문을 익혔고, 장성해서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에게 수학하였다. 1835년(헌종 1) 부친이 전염병으로 돌아가셨기에 항상 자식으로서의 정성을 다할 수 없었음을 평생 아픔으로 여겼으며, 벼슬하려는 생각을 끊고 효성으로 노모를 봉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슬픔으로 몸이 야위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당시 집안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밤낮으로 걱정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하고 절약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몸만 구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문중에는 의장(義莊)을 마련하였고 집에는 서숙(書塾)을 두었고 마을에는 별도의 곡식 창고를 만들었으니, 계회(契會)의 조약이 분명해지자 어진 풍속이 행해지게 되었다. 일찍이 마음이 외물(外物)로 내달리는 것을 걱정하자, 정재 선생이 주자(朱子)가 유정춘(劉靜春)에게 답한 편지와 남헌(南軒)의 「자수명(自修銘)」을 써 주면서 면려(勉勵)하였다. 만년에는 입천(廿川)의 선정(先亭)을 중건하였는데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다. 1887년(고종 24)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입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얼마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이수영(李秀榮)과 학당(學堂)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1893년(고종 30) 집 곁에 따로 정자 하나를 엮어 헌(軒)에는 ‘만서(晩棲)’, 실(室)에는 ‘자수(自修)’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자서(自序)를 지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옛날 위나라 무공(武公)은 95세의 나이에도 오히려 나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깨워주도록 좋은 말을 해달라고 하였다. 내 나이는 그보다 아직도 열 살 정도 적으니, 어찌 늙었다고 여겨 수양을 게을리할 수 있겠는가.”
질병이 있거나 빈객을 접대하는 일 이외에는 늘 책상 앞에 앉아 읊조리기를,
“늙어서 책을 읽으니 참으로 맛이 있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이 편지를 보내 하례(賀禮)하기를,
“촛불 밝히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학문의 실마리를 더욱 많이 찾으시니, 대질(大耋 80세)의 정력(精力)이 어찌 이런 정도에 이르셨습니까.”
1899년(고종 36) 8월 23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7세였다. 영해부(寧海府) 남쪽 대곡(大谷) 부병(負丙)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부인 전주류씨(全州柳氏)는 사인(士人) 병휴(秉休)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감찰 유영(有𨥭)이고, 딸 하나는 김인락(金麟洛)에게 출가하였다. 유영의 세 아들은 조와(朝洼), 후사로 나간 조호(朝灝), 조응(朝鷹)이다. 딸 다섯은 박태중(朴泰鍾), 이상교(李相敎), 류동두(柳東斗), 이현각(李鉉覺), 박종대(朴鍾大)에게 출가하였다. 김인락의 양자는 희병(羲秉)이고, 딸 둘은 이만훈(李晩薰), 권교연(權敎淵)에게 출가하였다.
저서로는 『유선록(儒先錄)』, 『역대총록(歷代總錄)』, 『수견록(隨見錄)』이 있다. 또한 일찍이 무이(武夷)·도산(陶山)·고산(高山)의 기영(記詠)을 한 책으로 편집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암송하며 감발하여 흥기하는 단서로 삼게 하였다.
영해 지방에 터를 잡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조는 송정(松亭) 남수(南須, 1395~1477)이다. 남수는 당시 영해 5대 성씨 가문 중 하나였던 대흥백씨 가문과 혼인하면서 1420년(세종 2)경부터 영해 인량마을(나라골)에 살았다. 그 후 자손 남두원(南斗遠)이 1630년(인조 8)경 괴시마을에 처음 입향한 것으로 추측된다. 『영양남씨족보』에는 남두원이 처음 괴시에 주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양남씨 괴시파(槐市派)가 괴시에 세거한 것은 약 4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벌의 두 아들인 남두건(南斗建)과 남두원의 후손들은 모두 괴시에 살고 있는데, 남두원의 후손들이 괴시파의 실질적인 중심축을 이루어 왔다. 남두원은 남붕익(南鵬翼), 남붕한(南鵬翰), 남붕구(南鵬九) 등 3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남붕익과 남붕한의 후손들이 아직도 괴시에 살고 있다. 현재 장남 남붕익의 후손들은 괴시파종택, 물소와고택, 주곡댁, 사곡댁, 영감댁, 경주댁, 천전댁 등에서 거주하며, 차남 남붕한의 후손들은 대남댁 종가와 영은고택, 해촌고택, 구계댁 등에서 거주한다.
영덕괴시리영감댁(盈德槐市里令監宅)은 호은(濠隱) 남흥수(南興壽)가 1847년(헌종 13)경 건립하였으며, 1938년에 그의 증손 남대철(南大轍)이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까지 대문채, 방앗간, 마구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영감댁은 정면 4칸, 측면 6칸의 건물로, 마을의 주 가로에서 보면 사랑채가 정면처럼 보인다. 사랑채를 비롯한 모든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안대청의 기둥은 원기둥을 사용하여 가옥의 격식을 높였다. 문화재자료 제4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