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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병곡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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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안동권씨 병곡종택
  • 주소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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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병곡종택

안동권씨 병곡종택

권주(權柱, 1457~1505)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이다. 증조 권심(權深)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강릉판관(江陵判官)에 이르렀는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 권항(權恒)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는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 권이(權邇)는 함종현령(咸從縣令)을 지냈는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덕산송씨(德山宋氏)는 찰방 송원창(宋元昌)의 딸이다.
권주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였으며 기억 능력이 특별하였다. 겨우 10세에 경전(經傳)과 사책(史冊)을 널리 통하였으며, 13세에 글귀를 지었는데 매번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문장과 글씨가 날로 더욱 정밀하고 오묘해졌다. 1474년(성종 5) 1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김용석(金用石),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고 혹 매달 초하루에 『소학(小學)』을 강론(講論)하기도 했는데, 그 모임에 든 사람들은 모두 당시에 명망 있는 선비들이었다. 또 최부(崔溥)와 서로 뜻이 잘 맞아서 일찍이 「동반록서(同泮錄序)」를 지어, 교제(交際)를 잘하고 신의(信義)를 돈독히 하며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가며 한마음으로 뭉친 우정이 쇠도 끊을 수 있다는 뜻을 담았다.
1481년(성종 12)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82년(성종 13)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했고, 이후 강경문신(講經文臣)으로 활약하였다. 1489년(성종 20) 공조정랑 재직 중에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요동을 내왕했고, 그해 11월 지평(持平), 1492년(성종 23) 6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1493년(성종 24) 12월부터 이듬해 8월에 걸쳐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대마도(對馬島)를 내왕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 군사들이 변방 백성들과 작은 이익을 다투어 불손한 언사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지니고 가서 도장(島將)에게 하유(下諭)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조정 신료 가운데에서 식견이 있고 대체를 아는 자를 가려서 보내야 한다”라고 하여, 이에 공이 선발되었다.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 지족당(知足堂) 조지서(趙之瑞) 등이 전송하는 글을 지었다. 복명한 뒤 사헌부로부터 사행(使行) 때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되었으나 용서받았고, 곧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에 승진하였다. 1494년(성종 25) 12월에는 직제학(直提學) 표연말(表沿沫), 전한(典翰) 양희지(楊熙止)와 함께 「대행왕행장(大行王行狀)」을 찬진하고, 1495년(연산군 1) 3월 다시 「대행왕시책(大行王諡冊)」을 지어 올렸다. 같은 해 8월에 집의(執義), 1498년(연산군 4) 7월에는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역임하였다.
1499년(연산군 5) 2월에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승진되었다. 이후 승정원 우부승지와 우승지를 거쳐 1501년(연산군 7) 1월에는 도승지에 승진되고, 같은 해 윤7월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502년(연산군 8) 10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동지중추부사로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03년(연산군 9) 4월 동지중추부사로서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했고, 같은 해 10월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윤4월 정축일에 갑자사화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받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또 사사(賜死)시켜야 한다는 전지가 있었으나, 유순(柳洵)·김수동(金壽童) 등이 “권주는 당시에 주서(注書)로서 단지 승지(承旨)의 지휘에 따랐을 뿐이다”는 계(啓)를 올려서, 사형을 면하고 장형(杖刑)을 받은 뒤 평해(平海)로 귀양을 갔으나 1505년(연산군 11) 6월 폐비 윤씨의 사사 때에 사약을 받들고 간 일이 거듭 논죄되면서 결국 사사되었고, 형제자매도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되었다.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伸冤)되고 포증(褒贈)이 더해져 의정부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권주는 천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행의가 잘 닦여지고 깨끗하였다. 곧은 절조와 맑은 이름으로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으며 또한 글을 잘 짓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니, 재능은 당세에 높았고 행실은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제권참찬묘도(題權參贊墓道)」 시에 “어두운 임금 만나 고난을 당한 것이 어찌 운수가 아니랴, 송백 우거진 무덤에 푸른 안개가 덮였네. 절조 높은 행실은 뒷날 기록으로 남겠지만, 천고에 전할 문장은 남은 게 없어 한스럽네[明夷蒙難豈非天 茂柏深松鎖翠烟 節行他年應有史 文章千古恨無傳]”라고 하여 그의 문장과 절행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부인 이씨는 지중추부사 시(諡) 정숙공(貞肅公) 휘 칙(則)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질(礩)인데 봉사(奉事)이다. 차남은 전(磌)인데 벼슬이 홍문관수찬과 이조원외랑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강포(强暴)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아, 일찍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의 간교함을 공척하였다가 결국 이로 인해 파직되고 과명(科名)을 삭제당했으며, 뒤에 또 송사련(宋祀連)에게 무고(誣告)를 당하여,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의 화(禍)가 일어났을 적에 죽임을 당했다. 듣는 사람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남은 석(碩)이다. 사남은 굉(硡)인데 참봉이다. 딸은 현감 박영석(朴永錫)에게 시집갔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은 권주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다음과 같은 명(銘)을 지었다.

士常病不得位 선비는 항상 지위를 얻지 못하여
無以展布其才能 그 재능을 펼 길이 없음을 병통으로 여기고
又常病身不修 또 항상 수양을 제대로 못 하여
名沒世而無稱 죽을 때까지도 이름이 알려지지 못함을 병통으로 여긴다네
惟先生發軔之初載兮 선생은 세상에 나간 첫해에
亦庶幾志得而名揚 뜻을 얻어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으니
吁嗟晩節之凶屯兮 아, 만년에 횡액을 당한 것은
諒遭時之不祥 참으로 상서롭지 못한 때를 만나 그리된 것이네
仁而遇禍災兮 어진 이가 재앙을 만났으며
履正道而蒙難 정도를 지키다가 환난을 당하였네
自古莫不然兮 예로부터 그렇지 아니한 적이 없었으니
於先生而又何歎 선생에게서 또 무엇을 탄식하리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선대부예조참판증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 권공 신도비명嘉善大夫禮曹參判贈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權公神道碑銘」, 『갈암집(葛庵集)』 권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