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벽진이씨 완석정종택(星州 碧珍李氏 浣石亭宗宅)
이언영(李彦英, 1568~1639)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군현(君顯), 호는 완정(浣亭)이다. 이인손(李麟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운(李運)이다. 아버지는 공조좌랑 이등림(李鄧林)이며, 어머니는 최호(崔湖)의 딸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효도와 청렴으로 순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3년(선조 3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며 벼슬길에 나갈 뜻이 없었다. 1613년(광해군 5) 호조정랑·태복시첨정(太僕寺僉正)을 거쳐 다음 해 사간원정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주장하는 정온(鄭蘊)을 변호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삭직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인조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성균관직강·사예(司藝)·내자시정(內資寺正)·사헌부장령이 되었다. 1625년(인조 3)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 그 뒤 밀양목사·청주목사·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를 도와 10여 년 동안 국방에 힘썼으며, 만년에 낙동 강가에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8권 4책의 『완정문집(浣亭文集)』이 있다. 권1에는 시 75수, 만사 33수, 권2에 서(書) 24편, 소(疏) 3편, 정사 4편, 계(啓) 5편, 장계 5편, 권3에 잡저 1편, 권4에 설 2편, 논 7편, 전책 1편, 권5에 제문 14편, 묘지 1편, 묘갈 2편, 행록 4편, 유사 1편, 권6에 연보, 권7·8에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유사·완석정기(浣石亭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78년 12대손 형기(瀅基)가 영인, 간행한 책에는 별집으로 국조실록(國朝實錄)·청증작소(請贈爵疏)·청증작시소(請贈爵諡疏)·동완양선생청시건원소(桐浣兩先生請諡建院疏)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의 「상한강선생문목(上寒岡先生問目)」은 정구(鄭逑)에게 상례(喪禮)를 질의한 문목이다. 「여신우태경숙(與申右台敬叔)」은 1624년(인조 2) 강사(江舍)에 우거하고 있던 우의정 신흠(申欽)을 위로한 것이다. 「여밀양사림(與密陽士林)」은 1637년(인조 15) 예림서원(禮林書院)을 중수할 때 선현의 배향 문제를 논의한 것이다. 선진과 후진을 따져 선진인 김종직(金宗直)에 신용개(申用漑)를 배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장현광(張顯光)·이도창(李道昌)·조희일(趙希逸) 등 명사들과 주고받은 서신이 많다. 소에는 장령의 사직을 청하는 「사장령소(辭掌令疏)」, 호종가자(扈從加資)의 사면을 청하는 「사면호종가자소(辭免扈從加資疏)」 그리고 성주 사림을 대신하여 선정을 베푼 민형남을 유임하게 해달라고 지은 「민후형남원류소(閔侯馨男願留疏)」 등이 있다. 장계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띠고 사포(蛇浦)에 내려가 올린 「도사포접대허천사장계(到蛇浦接待許天使狀啓)」 4편 등이 있다. 잡저의 「운계한화(雲溪閒話)」는 선세(先世)의 유적부터 여항(閭巷)의 세미한 일까지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을 모두 모아서 자손들이 참고하도록 기록한 것이다. 설에는 수박에 관한 「종서과설(種西瓜說)」 등이 있고, 논에는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나 역사적 사실을 평한 것이 대부분이다. 전책의 「문안위치란(問安危治亂)」은 나라의 선정을 논한 내용으로, 회시(會試)에서 장원한 책문이다.
낙연서당(洛淵書堂)은 골짜기 사이 평평한 충적지 위에 평평하게 대지를 정지한 다음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일자형의 건물을 앉혔다. 솟을대문인 읍청문(挹淸門) 문간채를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5칸의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온돌방 2칸[漾月軒], 대청 2칸[浣石亭], 온돌방 1칸[捿雲寮]이 연이어 있고 전면에 반 칸 툇마루가 있는 전퇴 중당협실형이다. 방 전면에는 심벽에 쌍여닫이 띠살창을 설치했고 청방간에는 사분합들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후면은 판벽에 쌍여닫이 바라지창[당판창]을 설치했으며 툇마루 양 단벽에는 쌍여닫이 골판창을 시설했다. 온돌방 양 측면에는 외여닫이 띠살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우측면에만 있다. 구조는 막돌 바른층쌓기로 한 시멘트 마감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앉힌 다음 전면과 대청 배면 중앙에만 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워 상부가구를 받고 있다. 한지를 몇 겹 둘러싼 주 상부는 보아지 외단을 꾸밈없이 직절한 몰익공 형태로 하여 주두를 앉히고 대들보를 얹었다. 보아지 내단은 연화를 초각했고 주간에는 창방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워 장식했다. 전체 5량가로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얹어 종보를 받고 있다. 종보 위는 원형의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어 가구를 완성했다. 청방간 대들보는 통부재를 이용했고, 특히 우측 방 상부에는 전면 쪽으로 쪽문을 내고 낮은 다락형의 수장 공간을 두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모서리 서까래는 마족연 형태이다. 내림마루 끝에는 명문망와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최근 번와를 해 현재는 없다. 추녀 끝은 암키와를 이용해 막새로 이용했다. 기단 정면에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