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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호계문중慶州李氏 虎溪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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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경주이씨 호계문중慶州李氏 虎溪門中
  •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큰골길 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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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이씨 호계문중慶州李氏 虎溪門中

경주이씨 호계문중慶州李氏 虎溪門中



이을규(李乙奎, 1508~1546)가 낙향해 머물렀던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호명리는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어진 범이 슬피 울었다고 하여 범우리, 범어리 또는 호명이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승삼마을[지금의 경주시 용강동]에는 승려로 변한 세 마리의 범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자주 해치곤 하였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합심하여 범을 몰아내기로 했다. 어느 날 일제히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 범을 쫓았다. 도망가던 범이 호명에 이르렀으나 형산강으로 산이 끊어지고 더는 도망갈 때가 없자 슬피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고려 현종 때 경주부윤으로 있던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승삼에 여승으로 변한 호랑이 세 마리가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을 듣고 범을 잡으려고 하자, 범이 도망가다가 지금의 호명 앞산에 이르니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으므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호명리는 본래 안강현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강동면 호명리로 되었다. 호명은 경주에서 7번 국도로 포항으로 가다가 모서에 이어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갑산리와 안강리 양동마을과도 맞닿아 있다. 형산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넓은 들판과 풍부한 물이 있어 일찍이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옛날부터 ‘일사방이호명’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곳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 광주안씨(廣州安氏), 달성서씨(達城徐氏)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을규의 자는 문경(文卿), 호는 호계(虎溪) 또는 양졸당(養拙堂)이다. 시조는 이알평(李謁平)이고, 고조 이운경(李云敬)은 사재감첨정을 지냈고, 증조(曾祖) 이수(李修)는 비순위중랑장을 지냈으며, 조부 이구산(李龜山)은 어모장군을 역임했다. 부친 이한주(李漢柱)는 전력부위를 지냈고,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조계량(曺繼亮)의 딸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문인으로,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5년(중종 30)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형조좌랑, 승문원교리, 경산현령, 초계군수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37년(중종 32) 사은사 겸 진하사 남세웅(南世雄)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비롯하여 모두 3차에 걸친 중국 사행을 수행하였는데, 중국 황제로부터 황금화로를 하사받았다. 1543년(중종 38) 경주 강동면 호명으로 낙향하였다. 부인은 축산전씨(竺山全氏) 전회옥(全懷玉)의 딸이다. 5남을 낳았는데, 이홍검(李弘儉), 이홍정(李弘淨), 이홍각(李弘愨), 이홍로(李弘魯), 이홍순(李弘醇)이다. 묘소는 경주 북군 화개산에 있다. 저술로 『호계선생일고(虎溪先生逸稿)』가 있다.
이을규를 향사하는 북산서사(北山書社)는 북호산 자락에 위치하여 제향 공간인 지경묘(持敬廟)와 강학 공간인 포요당(抱瑤堂)이 있다. 이 서사는 본래 1830년(순조 30) 경주 북군동에 북산사로 창건되었는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67년 호명리의 호계정사(虎溪精舍)가 있던 자리에 복원되었다. 3칸의 대문은 공심문(共尋門)이라는 편액이 있다. 강당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가운데 2칸의 대청이 있고 그 양옆에 각 한 칸씩 방을 두고 있다. 사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이정병(李鼎秉)의 「북산서사기(北山書社記)」에서 북산서사는 북산사의 터 앞에 3칸의 강당을 두고 그 좌우에 2칸씩 서재를 두었다고 하였다. 또 각 건물의 명칭은 사당은 지경묘, 강당은 포요당, 동재(東齋)는 심득재(心得齋), 서재(西齋)는 의중재(義重齋), 출입문은 공심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각 이름은 바로 이을규의 스승인 이언적이 이을규에게 준 시에서 따온 용어이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가는 이을규를 전송하면서 지은 「송이진사을규향낙(送李進士乙奎向洛)」 시 2수를 살펴보기로 한다.

깊은 봄날 머리 돌려 푸른 강물 바라보니 春深回首碧江頭
넓은 강이 대자연과 더불어서 흐르누나 浩氣聊同大化流
만물이 때를 만나 모두 절로 즐거운데 萬物得時皆自樂
일신이 분수대로 사니 또한 근심 없네 一身隨分亦無憂
온아하고 재주 있는 그댈 사랑하거니와 愛君溫雅才超衆
노쇠하여 머리 허연 내 모습이 부끄럽네 愧我摧頹鬢滿秋
알아주는 사람 없어 거문고 홀로 타니 獨抱瑤琴相識少
이별하면 그 누가 함께 이곳을 찾아올까 別來誰與共尋幽

성균관에 돌아가서 선사를 배알하면 君歸遊泮謁先師
충경으로 몸을 잘 지켜가야 하리라 忠敬應須好自持
높은 벼슬 부질없고 도의가 중하나니 軒冕如雲道義重
깨닫기를 구할 뿐 알려지려 하지 말길 只求心得不求知

즉 지경묘는 “충경으로 몸을 잘 지켜가야 하리라”에서 충경의 마음으로 몸가짐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이며, 포요당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이을규를 떠나보낸 쓸쓸함을 표현한 “알아주는 사람 없어 거문고 홀로 타네”에서 가져온 말이다. 이어서 “이별하면 그 누가 함께 이곳을 찾아올까”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인 심득재는 “깨닫기를 구할 뿐 알려지려 하지 말길”에서, 서재인 의중재는 “높은 벼슬 부질없고 도의가 중하나니”에서 가져온 말로 모두 이을규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데 남에게 알려져 현달해질 것을 바라지 말고 도의를 중시하며 학문에 전념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북산서사는 2013년에 경북문화재자료 제61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이정병(李鼎秉), 「북산서사기(北山書社記)」, 『금파집(琴坡集)』
  • 이언적(李彦迪), 「송이진사을규향낙(送李進士乙奎向洛)」, 『회재집(晦齋集)』
    정간(鄭榦), 「통사랑행성현도찰방이공묘갈명通仕郞行省峴道察訪李公墓碣銘」, 『명고집(鳴臯集)』
    이을규(李乙奎), 『호계실기(虎溪實記)』
    유교넷-목판아카이브(http://mokpan.ugyo.net/hyunpan/)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