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공간과 편액
  • 주거공간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공간명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한정로124번길 48
c033_1_1_001.jpg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반남박씨 소고문파문중潘南朴氏 嘯皐門派門中



산천서원(山泉書院)에 배향된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하면 다음과 같다.
① 송석충(宋碩忠, 1454~1524)은 본관이 야성(冶城),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이다. 아버지는 현령 송륜(宋綸)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창(韓昌)의 딸이다. 영주에 거주하였다.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김굉필(金宏弼), 최보(崔溥), 박담손(朴聃孫), 신희연(申希演)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② 오운(吳澐, 1540∼1617)은 본관이 고창(高敞), 자가 태원(太源), 호가 죽유(竹牖)·죽계(竹溪)이다. 오수정(吳守貞)의 아들로, 이황(李滉)·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학정·박사·전적·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경원부 아산보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 후 충주목사 겸 편수관을 거쳐 성균관사성을 지낸 뒤 사재감정이 되었고, 1589년 광주목사로 나아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모관·수병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때 백령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전후 2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 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선조 26)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權慄)의 추천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장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로 활약하였다. 1599년(선조 32)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하였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광해군 1)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년(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싸운 17장(將)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竹牖文集)』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東史纂要)』가 있다.
③ 장수희(張壽禧, 1516∼1586)는 본관이 인동(仁同), 자가 우옹(祐翁), 호가 과재(果齋)이다. 퇴계 선생이 초곡에 계실 때에 장수희는 여섯 살이었는데 책을 끼고 공부하러 가면, 매우 친절하고 절실히 가르치셨다. 후에 선생께서 최락당(最樂堂)이란 글씨를 써서 편액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만한 선을 가득 채워 즐거움에 이르라는 의미였다.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는 그가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창건에 실로 주된 역할을 하였고,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동안 서원의 규모를 세우고 비용을 보태었으며 모든 절목을 선생에게서 품정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음직으로 어모를 지냈으며 향년 71세였다. 형조참의를 증직받았으며 한천서원(寒泉書院)에 배향되었다.
④ 박회무(朴檜茂, 1575~1666)는 본관이 반남(潘南), 자가 중식(仲植), 호가 육우당(六友堂), 숭정야로(崇禎野老)이다. 소고 박승임의 손자이고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박록의 아들이다. 정구와 정경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성품이 중후하였다고 한다. 1606년(선조 39)에 진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였는데, 박회무 역시 이때 왕의 어가를 호종하였다. 조정에서 화의론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화의론을 적극 배척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발발 전에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시정의 폐해를 논하고 서북쪽 방어가 허술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병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출정하였으나, 이미 인조가 항복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회군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두문불출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소나무, 전나무,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를 심고 애호하면서 생을 마쳤는데, 그의 호인 육우(六友)는 바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영주의 산천서원에 배향되었다.
⑤ 박종무(1582~1664)는 본관이 반남, 자(字)가 계직(季直), 호(號) 삼락당(三樂堂)이며, 영주 한정에 거주하였다. 소고 박승임의 손자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문인이다.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학(經學)으로 여러 번 천거를 받았다. 이괄의 반란에 임금을 공주까지 백형과 함께 호종하였으며 병자란 이후 출사의 길을 끊고 연화산에 은거하여 시문을 지으며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조정의 기일에는 근신하면서 어육을 먹지 않았다.
➅ 두암(斗庵) 김약련(金若鍊, 1730∼1802)은 초곡(草谷) 서쪽에 있는 산천서원 주변의 지형과 주변 풍수에 대하여 자세하게 묘사한 『산천형승지(山泉形勝誌)』를 지었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48 반남박씨 소고문중』,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6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