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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興海裵氏 鹿洞里社 槐潭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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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興海裵氏 鹿洞里社 槐潭宗宅)
  • 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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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興海裵氏 鹿洞里社 槐潭宗宅)

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興海裵氏 鹿洞里社 槐潭宗宅)


배상열(裵相說, 1760~1789)은 자가 군필(君弼), 호가 괴담(槐潭), 본관이 흥해(興海)이다. 그는 여말선초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배집(裵緝),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경여(權慶餘)의 딸이다. 배상열은 5~6세에 이미 글을 읽고 썼으며, 11세에 한 스승 밑에서 글을 배우려고 찾아갔다. 그 스승은 그의 재능을 확인하기 위해 어린 배상열에게 제목을 주고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배상열은 즉석에서 “수토목금으로 닦아서 인의예지의 학문을 닦아 이루네[水土木金修 仁義禮智學]”라고 답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 유학이 추구하는 근본적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후 배상열은 신동(神童) 혹은 귀재(鬼才)로 찬사를 받았다. 15세에 『역학계몽(易學啓蒙)』, 『율려신서(律呂新制)』 등의 천문·역학 서적을 탐독하여 상수학(象數學)에 통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밤이면 천상을 관찰하여 일영대(日影臺)와 혼천의(渾天儀)까지 제작하여 연구하였다. 아울러 기년(朞年)을 계산하고 피타고라스 정리와 동일한 구고(句股)의 산법을 정리하였다. 배상열은 역학과 산학·천문학 등을 탐구하였지만 가슴속에는 성리학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권사회(權思晦, 1741~1810)의 주선으로 1781년(정조 5) 9월 21일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을 찾아갔다. 배상열은 이상정의 훈도를 받은 3일간의 만남을 『호상종학록(湖上從學錄)』으로 남겼다. 『호상종학록』은 비록 일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이상정과의 의리지학, 경서 등에 관해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이 담겨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상정은 배상열에게 “그대는 천문·성력(星曆)을 먼저 했으니, 이제는 마땅히 도학(道學)을 공부하라”고 가르쳤다. 특히 이상정은 배상열에게 『대학』을 공부할 목표로 제시하였다. 그는 소호리를 떠난 이후 곧장 태백산으로 들어가 『대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태백산에서 『대학』 공부를 하다가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어 질의하곤 하였다. 배상열은 이상정의 가르침 대로 사서(四書)를 깊이 연구하여 『사서찬요(四書纂要)』를 저술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스승은 배상열이 문하에 든 그해 겨울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후 배상열은 이상정의 아우인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에게 배웠다. 배상열은 벼슬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이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는 풍류남아였다. 특히 산수를 좋아하여 집 근처 회화나무 아래에 작은 연못을 파고서 ‘직방당(直方塘)’이라는 이름을 짓고 늘 여기에서 독서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괴담처사(槐潭處士)’라고 불렀다. 그러던 그는 1789년(정조13) 봄 알성과(謁聖科)에 응시한 선비를 따라 한양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적은 과거에 있지 않았기에 평생에 한 번도 과거를 치른 적이 없다. 그는 다만 한양의 풍물을 두루 구경하였을 따름이다. 한양에서 다시 집으로 오는 길에 단양(丹陽)의 산수를 두루 찾아 구경하였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곧 병에 걸려 1789년(정조 13)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배상열의 문집으로는 『괴담유고(槐潭遺稿)』가 있고, 『괴담유고』에 들어 있지 않은 저술로 『성리찬요(性理纂要)』, 『사서찬요(四書纂要)』, 『계몽도해(啓蒙圖解)』, 『서계쇄록(書計瑣錄)』 등이 있다. 그의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2리 녹동에 있다.

배상열 사후 후학들과 후손들은 사당을 건립하여 그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으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다가 그의 손자 신수헌(愼修軒) 배약주(裵約周, 1817~1882)가 봉화현감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완공하였다.

조술도(趙述道, 1729~1803)는 배상열의 문집인 『괴담유고』 서문에서 “배상열은 어린 시절 학문을 연구하여 천지가 높은 까닭, 음양이 작용을 일으키는 이치, 해와 달이 운행하는 도수, 조수가 번식하는 원리, 별과 달력에서부터 초목(草木)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 1740~1811)은 『괴담유고』 발문에서 “1789년 봄에 배상열이 서울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며칠을 함께 묵었는데 그의 행동거지는 편안하면서도 자세하였고 말은 우아하면서도 신칙하여 법도 있는 집안의 모범이었다”라고 하였다. 또 황용한(黃龍漢, 1744~1818)은 “배상열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성인(聖人)의 글을 한 번 보면 이해하였고 조화의 이치가 무궁하였으니 스스로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배상열은 진실로 세상에 드문 기재(奇才)이다. 그의 뜻은 웅대하였고 그의 자질은 통달하였으며 그의 안목은 높았고 그의 진전은 빨랐으며 그의 행실은 겸손하였다”라고 하였다.

녹동리사(鹿洞里社)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앞마루는 따로 없다. 기단은 자연석을 크기를 고려하지 않고 크고 작은 것을 한꺼번에 뒤섞어 무릎 높이로 쌓아 올렸다. 그 위에 뜰 영역을 30㎝ 정도 두고 안으로 들여서 역시 자연석 주초를 놓고 건물을 세웠다. 주초는 두꺼운 판석인데 역시 자연석이고 크기도 들쭉날쭉하다. 주초와 기단 영역에서는 이렇게 계획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미학적 특징으로 나타나지만, 건물 영역은 단정한 균형의 미학이 중심적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 청량산박물관, 『괴담 배상열의 천문과 선기옥형』
  • 한국국학진흥원, 국역 『괴담유고』 해제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