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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포산고가(玄風郭氏 苞山古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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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현풍곽씨 포산고가(玄風郭氏 苞山古家)
  • 주소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9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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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포산고가(玄風郭氏 苞山古家)

현풍곽씨 포산고가(玄風郭氏 苞山古家)


곽안방(郭安邦)의 자는 여주(汝柱),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할아버지는 사재감사(司宰監事) 곽경(郭鏡)이고, 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事) 곽종번(郭宗藩)이며, 어머니는 군사(郡事) 나사훤(羅士愃)의 딸이다. 세종 말엽에 무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해남현감(海南縣監)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한 관리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세조가 집권하는데 군공(軍功)이 인정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세조 연간에 익산군수로 발령받아 청백리에 오르게 된다. 선생은 익산군수를 마지막으로 고향인 솔례 마을(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리)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다. 곽안방은 군현(郡縣)에 나가 정사를 펼 때는 엄하고 분명하며, 또한 어질고 용서를 베풀었다. 그러나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노래하며 속이지 않았다. 평생 동안 얼음과 옥 같은 처신을 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 필의 말로 고요하고 쓸쓸하게 돌아오니 백성들이 태수의 행차인 줄을 몰랐다고 전한다. 또 익산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한 노비가 열쇠 하나를 차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말했다. “이것 또한 관공서의 물건이니 어찌 작고 큰 것을 논하겠는가. 나를 더럽힐 수 없다”라며 바로 돌려보내도록 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현어(懸魚)를 실천한 것과 같다”라고 했다. ‘현어(懸魚)’는 관공서에서 선물 받은 고기를 창고에 달아 놓고 떠날 때 가져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관리들의 청렴에 비유되곤 했다. 제자백가를 관통하고 음양지리의 서적에도 능통했던 그는 현풍의 서쪽 솔례 마을에 자리 잡아 거주하면서 “산수가 웅장하고 선명하여 맑은 기운이 모이었으니 영특한 나의 자손이 반드시 많이 태어나리라. 세상을 울릴 자손이 많이 번성하여 뻗어가는 것이 낙동강과 함께 시종(始終)을 함께 하리라”라고 하였다. 한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명환록(名宦錄)」에는 “곽안방은 마음 쓰는 것과 행신하는 것이 뛰어났고, 한 가지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교유하는 벗이 그 당시의 명류들이어서 어진 사대부가 그 집에 많이 모여들었다. 벼슬을 하며 청백하기가 빙옥(氷玉)같이 깨끗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필마행장(匹馬行裝)으로 돌아올 때는 나는 듯이 가벼웠다”라고 하였다.

곽안방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현풍면 솔례 마을 입구에는 한 가문에 충신 1명, 효자 8명, 열부(烈婦) 6명을 표창해 기린 12정문(旌門)이 세워져 있는데, 조선시대 유교문화 사회에서 충(忠)·효(孝)·열(烈)·삼강(三綱)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은 윤리도덕의 최고 가치였다. 곽안방의 현손인 충렬공 곽준은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왜적 주력부대와 맞서 싸우며 황석산성을 수호하다 중과부족으로 마침내 화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의 큰아들인 곽이상과 둘째 아들 곽이후가 보호하려 하자 “나는 직책이 있으니 사수를 해야 하지만 너희들은 피난하라”고 했으나 두 아들은 “아버님이 구국을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부친을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겠습니까”라면서 호위하다가 함께 참해(斬害)를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곽이상의 부인 거창 신씨는 남편을 따라 성안에서 자결하고, 곽준의 딸로 류문호의 부인인 현풍 곽씨는 친정의 변고를 듣고도 싸움터로 나갔다가 그의 남편이 전사하자 바로 목매 자결하였다. 이러한 오중(五重)의 순사(殉死)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는 정문을 지어 표창할 것을 명했다. 이와 함께 곽재훈은 임진왜란 때 병든 몸으로 네 아들과 함께 달성 비슬산 중턱 산성굴에 숨어 있었는데, 왜적들에게 발각당해 그를 살해하려고 하자 네 아들이 차례로 호위하다 왜적들의 칼에 목이 잘렸다. 마지막에 그만 살아남으니 왜적들도 그 효성에 감동해 석방하면서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글자를 쓴 패를 달아 주어 해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후 굴은 ‘사효자굴’로 불리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정문을 지어 표창했다. 이밖에 곽주의 아들 의창·유창 형제의 효행, 열부(烈婦) 광릉이씨·밀성박씨·안동권씨·전의이씨, 효자 곽경성이 12정려(旌閭)의 주인공들이다. 모두 곽안방의 후손들이다.

현풍곽씨(玄風郭氏) 혹은 포산곽씨(苞山郭氏)는 송(宋)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귀화한 곽경(郭鏡)을 시조로 한다. 그는 문연각(文淵閣)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1133년(인종 11) 7명의 학사(學士)와 우리나라에 와서 1138년(인종 16)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력을 거친 뒤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짐으로써 후손이 본관을 포산으로 하였다. 조선에 이르러 포산군이 현풍현으로 개편됨에 따라 현풍이라 개칭하게 되었으나, 양관(兩貫)을 병용하게 되었다. 본래 이곳은 현풍군 마산면 지역으로 대니산(戴尼山) 밑에 으뜸가는 큰 마을이라 해서 대동(大洞)이라 하였는데, 솔례는 대동의 본마을이다. 1467년(세조 13)에 곽안방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자손이 세거하면서 예절 바른 사람이 되라고 솔례라 이름했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발음하기 편해서 ‘소래골’이라 발음한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2』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