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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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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 주소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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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우계이씨 취사문중(羽溪李氏 炊沙門中)


이여빈(李汝馪, 1556~1631)은 본관이 우계(羽溪), 자가 덕훈(德薰), 호가 도촌(道村)·감곡(鑑谷)·만취(晩翠)·취사(炊沙)이다.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35~1528)의 후손이다. 감곡(鑑谷)의 우계이씨 입향조인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며 처음엔 한우(韓佑)에게 배우다가 소고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 들어가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선조 28)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찰방에 임명되었으나 노모의 병간호로 사직하였다. 1610년(광해 2) 성균관전적에 승진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이 권세를 잡으면서 세상이 자못 어지러웠다. 이에 이이첨을 목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또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취사는 7일 동안 궐문(闕門) 밖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으며, 또 인수정(因樹亭)을 지어 시서(詩書)를 즐기며 삶을 마쳤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활동과 처절했던 난리의 상황을 기록한 『용사록(龍蛇錄)』을 남겼고, 영주지역에 대한 관심을 두어 『영주지(榮州誌)』를 간행하려고 서문까지 써놓았으나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취사문집(炊沙文集)』 6권이 전한다.

이여빈의 후손들은 이곳 감곡에서 대를 이어 살았는데, 이인좌의 난 때 순흥 의병장을 역임한 무릉(武陵) 이징도(李徵道)를 비롯하여 백은당(白隱堂) 이진만(李鎭萬, 1675~1752), 진보현감을 지낸 이진주(李鎭周), 감호(鑑湖) 이경제(李慶濟)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현재 이곳 감곡에는 인수정, 백은당, 우계이씨 별묘(別廟), 우계이씨 재사(齋舍), 취사종택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여빈이 건립한 인수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방형(方形) 정자로 좌측은 마루칸이고 우측은 온돌방 칸반(1칸 반? 반 칸?), 툇마루를 내밀고 헌함(軒檻)을 돌렸다. 당호인 인수(因樹)란 ‘나무에 기대어 집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자신의 몸을 낮추고 숨어 산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건물의 지붕은 홑처마 팔각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우계이씨 별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고, 재사는 취사 이여빈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하였는데 종택과 별묘 사이 넓은 터에 동남을 향한 ‘ㅡ’ 자형 몸체와 ‘ㄴ’ 자형 아래채가 전체적으로 ‘ㄷ’ 자형을 이루고 있다. 취사종택은 감실 북쪽 산자락 끝에 동남쪽을 향한 안채와 사랑채, 동북쪽을 향한 옆채가 전체적으로 튼 ‘ㄷ’ 자형으로 놓여 있다. 취사의 묘역은 동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는 야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

참고문헌
  • 이여빈, 『취사집(炊沙集)』, 한국고전번역원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