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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향교(禮安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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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예안향교(禮安鄕校)
  •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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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향교(禮安鄕校)

예안향교(禮安鄕校)


예안향교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04-1번지에 위치한 조선 전기 관학 교육기관으로, 오늘날의 국립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예안향교는 1411년(태종 11)에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보호수로 지정된 양호루 앞 은행나무가 말해주듯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향교란 제사와 교육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예안지역에서 이러한 기능을 가진 공간은 예안향교가 처음이고, 이후 1570년(선조 3) 우탁을 제향하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설되기 전까지 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퇴계 이황을 비롯한 예안의 선비들이 이곳을 출입하면서 학업을 익힌 곳으로 예안지역 교육의 토대를 형성한 메카이기도 하였다.

예안향교에 대해 권시중이 편찬한 『선성지』에는 “현 북쪽 2리에 있다”라고 되어 있을 뿐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런데 구한말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필사본 『선성지』 증보(增補) 조에는 비교적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경상도관찰사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예안향교에 들러 대성전에 배알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내가 어찌 교화를 베풀고 풍속을 살피리오
얼굴 들고 영남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구나
부디 소학으로 떳떳한 가르침을 부지하여
여러 학생들이 날로 새롭기를 권면하노라

김안국은 인재양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예의를 밝히고 염치를 기르는 것을 입교(立敎)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렇듯 김안국이 유생들을 부지런히 이끌어주고 경계함이 이 한 절구 시에 밝게 드러나서 당시의 군자들이 매우 감탄하여 이를 목판에 새겨 걸었다. 또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에도 이를 알려 많은 인재들에게 소학을 권장하게 하였다. 한편 1572년(선조 5)에는 전곡(錢穀)을 모아 춘추석전(春秋釋奠) 때 여러 집사들이 상재생(上齋生)(금응협, 조목)과 하재생(下齋生)(김기, 김해)을 접대하여 시례(詩禮)와 문행을 날마다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예안을 문헌의 고을이라 일컫게 되었고 또 영남의 사론이 모두 이 향교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예안향교는 1490년(성종 21)에 보수를 한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 수리 등의 과정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1569년(선조 2)에 현감 손영제가 중수하였고, 1625년(인조 3)에 수리가 되었으며, 1745년(영조 21)에는 현감 김광수(金光遂, 1696~?)가 중수하였다. 1841년(헌종 7)에 다시 수리 과정을 거쳐 1900년(고종 37)과 1954년에도 중수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8월 31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경상북도 향교재단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이렇듯 예안향교는 오랜 세월 동안 예안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관민들의 열과 성에 의해 현재까지 유지되어 왔다.

예안향교의 제향은 춘추절인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받들고 있다. 춘추 석전제는 한 달 전인 음력 정월 초사흘과 음력 칠월 보름이 되면 예안향교 전교를 비롯한 장의 16명이 예안향교에 모여 대성전에 알묘 분향을 한 후에 명륜당에 모여 석전을 봉행할 제관과 집사를 선정한다. 제관과 집사의 선정은 예안향교 지부와 녹전·도산·와룡면의 예안향교 지소에서 적당한 인물을 추천하면 이날 모임에서 결정된다. 여기에서 초헌관을 비롯한 모든 헌관과 제집사들을 선정하고 유생들을 뽑는다. 향교 석전제의 초헌관은 예부터 고을 수령이 전담하여 왔다. 주지하다시피 안동시는 1995년에 시군이 통합되었다. 그 이전에는 안동군수가 예안향교의 초헌관을 맡아오다가 통합 이후에는 안동시장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안동에는 예안향교와 안동향교가 있다. 그래서 안동시장은 춘계 석전제에는 예안향교의 초헌관이 되고 추계 석전제에는 안동향교의 초헌관을 맡아 제를 올리고 있다. 그러므로 추계 석전제에는 향교 전교가 초헌관이 되거나 대학교 총장, 한국국학진흥원장 및 지역교육장이 맡기도 한다. 초헌관을 비롯한 여타 제관이 선정되면 정해진 서식에 따라 망기(望記)를 발송한다. 망기를 받은 사람이 유고가 생겨 참석하지 못할 경우에는 늦어도 행사 7일 전까지 단자를 내어야 한다. 제관과 유사들은 석전 전날 저녁에 향교에 들어와 재계(齋戒)에 드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당일 아침에 입교한다. 헌관과 찬자와 축관은 동재인 거인재에서, 유생과 장의들은 서재인 유의재에서 기숙한다. 석전은 서원의 향사와는 달리 오전 10시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향교에서 동시에 지낸다. 당일 아침에 행사 준비를 위해 집사들은 전사청과 고직사에서 석전에 쓰일 제물을 손보고 장의들은 헌관들이 입게 될 금관제복 다섯 벌과 축관과 찬자가 입을 관복 두 벌을 마련해둔다. 행사 당일 도착한 유생들은 유의재에서 도포와 유건을 갈아입고 명륜당에서 시도부에 본관, 나이, 거주지를 등재한 후 분정례를 시행할 때까지 기다린다.

예안향교의 건물로는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 문루인 양호루(養浩樓)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기숙사인 동재(거인재居仁齋)·서재(유의재由義齋), 대성전(大聖殿)과 내삼문(內三門), 그리고 여러 부속 건물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황만기, 『선성지와 서부리』, 민속원, 2018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안동문화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