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평은 오계서원(榮州 平恩 迃溪書院)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은 본관이 영천(永川), 자가 굉중(宏仲), 호가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3년 뒤에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글을 배웠으며, 이듬해인 1559년(명종 14)에는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덕홍은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고,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귀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귀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선조 27)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 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선조 29)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덕홍은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똑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서재(西齋)인 관서헌(觀書軒)과 동재(東齋)인 관성재(觀省齋)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홑처마 맞배지붕에 한실골기와를 이은 3량가 납도리집이다. 평면은 마루방 1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가 깔려 있다.
참고문헌- 장재호·김우동 역, 『간재집』, 한국국학진흥원, 2018이재곤, 『오계서원』, 오계서원, 2008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