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 공간과 편액
  • 주거공간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의견달기 URL
목록 이전 기사 다음 기사
  • 공간명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 주소 봉화군 법전 성잠마을
a021_1_1_001.jpg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봉화 법전 진주강씨 입재문중(奉化 法田 晉州姜氏 立齋門中)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은 백부인 성재(省齋) 강찬(姜酇)에게 학업을 익히다가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다. 약관 무렵에 과거를 그만두고 독서에만 매진하다가 독학을 하면서 학문이 자칫 고루해질까봐 멀리 노성에 있는 윤증에게 편지를 보내어 의심되는 부분을 질의하였다. 일찍이 아들 택일(宅一)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정통 학문의 종주는 마땅히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퇴계 이황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퇴계 이후로는 명재께서 그 전함을 얻었는데 규모가 온자하고 실천이 독실하니 진정 훌륭한 현자였다. 내 어려서부터 도의에 감복하여 의귀처로 삼았다. 그런데 네가 만약 편협적인 논리와 색목으로 명재를 존숭한다면 이것은 명재를 진정으로 존숭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남기신 문집을 오래도록 일삼는다면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를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고 “독서하는 순서는 먼저 『소학小學』 → 『격몽요결擊蒙要訣』 → 『주문지결朱門旨訣』을 배우고 나서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 『사서四書』를 읽어야 하며, 본질을 숭상하고 부화함을 없애고 행동을 먼저 하고 문예를 나중에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재항은 진주강씨 법전 문중에서 처음으로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고, 이외에도 강윤(姜潤), 강숙(姜潚), 강필효(姜必孝), 강한규(姜漢奎), 강제(姜濟), 강위(姜鍏), 강용(姜鎔), 강신혁(姜信赫) 등 모두 9명이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강운(姜橒)과 강신혁(姜信赫)은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강재숙(姜再淑)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청보(靑甫), 호는 설죽당(雪竹堂)이다. 도은(陶隱) 강각(姜恪)의 손자이고, 잠계(潛溪) 강우(姜鄅)의 장자이다. 문장에 능하고 필법이 뛰어났다. 특히 왕희지의 참된 도리를 얻어 글씨의 오묘함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영가읍지』 등의 기록을 보면 “전주이씨(全州李氏)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와 해평윤씨(海平尹氏)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함께 당대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영조 무신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란에 창의하여 격문을 붙이고 열읍에 통문을 보내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의지심을 격동케 하였다. 특히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그가 지은 격문의 글과 글씨를 보고 크게 감탄하여 상찬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관찰사 법천(法川) 강윤(姜潤, 1711∼1782)은 족조(族祖) 강재숙의 유덕을 추모하는 제문에서 “문장과 필법에 뛰어났다. 선친과 같은 해에 태어나고 동문수학하였던 일을 회고하였다. 천성이 단정하고 온화하였고 재주와 학식이 고매하였으며, 일찍 과거에서 뛰어난 명성이 있었으나 궁벽한 마을에서 살면서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였으며 나이가 들수록 고아하고 뜻은 더욱 돈독하였고, 기운과 정신이 왕성하여 80세가 넘어서도 눈과 귀가 밝고 걸음걸이가 소년 못지않아 거의 지상의 신선과 가까웠다.”고 하였다. 저서에 『산재차록山齋箚錄』이 있었으나 화재로 전하지 않는다. 후사가 없어 그의 아우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의 아들 택일(宅一)을 양자로 삼았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봉화의 네 문장가 즉 내성사로(乃城四老)의 한 사람인 모산(茅山) 이동완(李棟完, 1651∼1725)이 관동으로 유람 가는 강재숙에게 준 시가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남아가 기이한 기상 지녔건만
어찌 궁벽한 시골만 지키리오
아득히 일상적 변화 뛰어넘고
펄럭이며 먼 유람을 일삼으리
부상의 나무로 소매를 떨치고
만폭동의 물로 갓을 씻으리라
맹생이 우임금 유적을 엿본들
그대의 장대한 완상만 못하리라

男兒負奇氣
何得守窮陬
邈爾超常戀
翩然事遠遊
拂袖扶桑樹
濯纓萬瀑流
孟生窺禹穴
壯賞似君不

진주강씨 법전 문중의 세거지인 봉화군 법전면은 문수산과 태백산을 끼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안동부 춘양현에 편입되었다가 순흥부에 속하기도 하였다. 진주강씨가 법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계기는 한산군수를 역임한 강덕서(姜德瑞, 1540~1614)의 후손인 강윤조(姜胤祖, 1568~1643)와 그의 두 아들 잠은(潛隱) 강흡(姜恰)과 도은(陶隱) 강각(姜恪)이 병자호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법전리로 입향하면서부터이다. 강흡과 강각은 부모님을 모시고 1636년(인조 14) 12월 파주 교하에서 출발하여 1637년(인조 15) 1월 매창(梅窓) 정사신(鄭士信)의 조카사위인 권산기(權山起)의 시골 농장이 있는 법전리 성재미[성잠星岑]에 우거(寓居)하였다. 법전 진주강씨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나뉘어 마을의 토대를 형성하였는데, 양지마을에는 주로 소론으로 활동했던 강각의 후손들이 거주하였고, 음지마을에는 노론의 당색을 띠었던 강흡의 후손들이 거주하면서 명실상부한 진주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양지마을에는 도은종택과 해은구택 등이 있으며, 음지마을에는 기헌고택과 경체정 등이 있다.

법전은 괴리 또는 유천이라고 하는데, 법전이라는 지명은 법흥사라는 사찰 앞에 있던 큰 밭을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법전천의 옛 이름인 유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즉 유(柳)자의 훈인 ‘버들’이 ‘법(法)’으로 변해 법계(法溪), 법전천(法田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강흡과 강각 형제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숭명배청의 대명의리를 실천하기 위하여 파주로 돌아가지 않고 법전에 정착하였다. 이들 형제는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포옹(抱翁) 정양(鄭瀁),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손우당(遜憂堂)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칭송되어 숭정처사(崇禎處士)로도 불렸다. 또한 강각은 태백오현에 더하여 태백육은(太白六隱)으로 일컬어졌고, 중국 동진 때의 시인 도잠 도연명의 ‘도(陶)’를 따서 ‘도은(陶隱)’이라 자호하였다. 남송을 인정하지 않아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채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은거했다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버드나무를 신하의 충절에 빗대는 전통을 낳았다. 따라서 입향조인 강흡과 강각 형제가 견지했던 숭명배청의 의리가 도연명의 고사와 상통하여 법전천의 어원인 유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법전마을은 태백산을 향해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인 비룡승천형의 풍수지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여기에 법전면 풍정리와 봉성면 창평리 사이에 있는 갈방산과 가마봉이라는 두 개의 문필봉을 끼고 있어 문과 급제자 25명(음지마을 13명, 양지마을 12명), 무과 급제자 2명, 소과 합격자 31명과 고시 합격자 13명, 그리고 박사와 학자들을 대거 배출하여 영남의 명문가로서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참고문헌
  • 윤광소尹光紹, 「입재강공묘지명立齋姜公墓誌銘」, 『소곡유고素谷遺稿』 卷8.
  • 이동완李棟完, 「증강청보(재숙)김강지행贈姜淸甫[再淑]金剛之行」, 『모산집茅山集』 권2.
  • 김정미, 『진주강씨 법전문중 도은종택 및 석당공』,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41, 2017.
  • 진주강씨 법전문중 응교공 종회, 『진주강씨 법전문중지』,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