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李璜)을 시조로 하는 고성이씨(固城李氏)는 고려 후기 이진(李瑨)의 아들 이존비(李尊庇, 1233~1287)가 지밀직사사의 관직을 지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는 등 크게 현달함으로써 중앙의 명문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이존비의 손자 이암(李嵒, 1297~1364)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의 봉호와 공신호를 받음으로써 중앙 정계에서 명문의 지위를 굳혔다. 이암의 네 아들이 모두 현달했는데, 특히 고성이씨 임청각의 직계 선대가 되는 막내 이강(李岡, 1333~1368)은 정2품인 밀직부사를 지냈다. 뿐만 아니라 본래 밀직부사에게는 시호를 내리지 않는데 공민왕이 특별히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로 이강을 아꼈다. 고성이씨의 명성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강의 아들 이원(李原, 1368~1429)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주관한 과거에서 급제하였고, 조선에서는 태종과 세종을 섬겨 공신으로 책봉되어 지위가 좌의정에 이르렀다.고성이씨의 안동 세거는 이원의 아들인 이증(李增, 1419~1480)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증은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진해와 영산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455년(세조 1)에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어 왕위에 오르고,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이에 이증은 과감하게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와 새로운 터전을 열었다. 고성이씨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600여 년 동안 안동에서 세거하고 있다.이증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인 이굉(李浤, 1441~1516)과 셋째인 이명(李洺)은 안동에 정착하여 이굉은 ‘귀래정파(歸來亭派)’, 이명은 ‘임청각파(臨淸閣派)’를 형성하였다. 이굉은 병조참의, 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했으나, 1513년(중종 8)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와 낙동강 가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이명은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나 이 무렵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돌아와서, 1519년(중종 14)에 안동부 동쪽 법흥사의 서쪽 비탈에 ‘임청각(臨淸閣)’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이명의 아들 이굉(李肱)은 중부 이굉이 지은 ‘귀래정’ 동쪽에 ‘반구정(伴鷗亭)’을 지어 이곳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 1514~1563)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퇴계학파에 속하게 되었다. 고성이씨 임청각파는 이명에서 시작되어 이굉을 거쳐 이용의 대에 이르러 영남의 사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굉의 증손인 이적(李適, 1566~?)이 안동읍 남선면 현내리로 분가했다가, 수해를 당하여 지금의 임청각 옆에 있는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고성이씨 임청각 탑동파(塔洞派)의 파조가 되었다. 이후 이적의 증손인 20세 이후식(李後植, 1653~1714)은 8남 2녀를 두어 가문을 크게 번성시켰다. 24세 북정(北亭) 이종주(李宗周, 1753~1818)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제자로, 1780년(정조 4)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종택 뒷산에 ‘북정(北亭)’을 지은 뒤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26세 약계(藥溪) 이정백(李庭百, 1795~1882), 29세 근암(勤菴) 이승렬(李承烈, 1862~1884), 31세 이찬형(李贊衡, 1907~2001) 등을 거쳐 지금까지 고성이씨 임청각의 탑동파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탑동종택이 있는 자리는 신라 때 법흥사(法興寺)가 있었기 때문에 ‘법흥’, ‘법흥곡’으로 불렸고, 또 종택 바로 앞에는 전탑(塼塔)이 있어 ‘탑동(塔洞)’으로 불리게 되었다.한편, 명호서원은 용헌 이원을 주향으로 망헌(忘軒) 이주(李胄, 1468~1504)를 배향위로 모시고 있다. 용헌 이원은 자가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본관은 고성이며, 부친은 강(岡)이고, 안동 입향조 이증은 그의 6남이다. 그는 3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고, 5세부터 자형인 양촌(陽村) 권근(權近)에게 수학하였다. 1382년(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1392년(태조 1) 25세 때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에 출사하여 왕조의 기틀을 닦는 데 도움이 되는 소를 많이 올렸다. 그는 태조, 태종, 세종 등 세 조정을 섬겨 여러 조(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헌사(憲司)의 장관을 세 번 지낸 다음 정승의 자리에 올라 당대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 때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여산(礪山)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사위 권람에 의해 관작이 회복되었다. 용헌 이원은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國基)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외교에 능숙하여 여러 차례 사신으로 발탁되었다. 저서로는 『용헌실기(容軒實記)』가 있다.망헌 이주는 자가 주지(胄之), 호가 망헌(忘軒), 본관은 고성이며, 부친은 평(泙), 모친은 허추(許樞)의 딸이다. 조부는 안동 입향조 증(增)이고, 증조는 원(原)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 19)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검열,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참혹한 고문을 받고는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다시 사면되어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다시 복위시켜서는 안 된다는 문제로 직언을 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한 가문이 화를 입어 숙부인 개성유수 이굉은 영해로 귀양을 갔고, 의흥현감 이명은 영덕으로 귀양을 갔으며, 형인 이윤(李胤)은 거제로, 아우 이려(李膂)는 진도로 귀양을 갔다. 사후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원(忠元)이다. 저서로는 『망헌유고(忘軒遺稿)』가 있다.명호서원(明湖書院)은 1790년(정조 1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용헌 이원과 망헌 이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자미산 아래에 있었고, 서원의 명칭도 ‘명계서원(明溪書院)’이었다. 그러나 1837년(헌종 3)에 안동 남선면 정상동으로 이전하여 명호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안동으로 이전한 뒤로 우향계(友鄕稧)의 모임이 이곳에서 자주 열렸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모두 훼철되고 주사(廚舍)만 남았다. 이후 복원되지 않다가, 안동 와룡면 도곡리에 있던 어은(漁隱) 이용(李容)의 묘소 수호를 위해 건립한 재사를 1973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여 명호서원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어은정사(漁隱精舍)를 명호서원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건물은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에 강당 및 담장을 크게 수리하여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당초의 명호서원 주사는 안동 와룡면 도곡리로 이건하여 도곡재사(陶谷齋舍)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권진호, 「고성이씨 가문 연원과 학문 활동」, 『영남지역 고성이씨의 학문과 문화』, 고성이씨안동입향조탄신600년기념사업회, 2018
- 서수용, 「고성이씨 탑동파에 대하여」(제52회 누정순회강좌), 안동청년유도회, 2014
- 안현, 「안동 고성이씨 가문의 가학 전통과 그 특성」, 『(2019 역사인물 선양학술대회) 동구 이준형의 학문과 독립운동』, 한국국학진흥원, 2019
- 우진웅, 『고성이씨 탑동종택』, 한국국학진흥원, 2016
- 이종서, 『군자불기의 임청각, 안동 고성이씨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6
- 임노직, 「명호서원(明湖書院)」, 『안동의 서원』, 안동청년유도회, 2016
-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