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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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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 주소 예안 오천동-와룡면 군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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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광산김씨 후조당종가(光山金氏 後彫堂宗宅)


오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 지역으로 외내, 오천(烏川)이라 하였다. 외내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가 ‘한줄기로 맑은 개울’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은 물이 맑을 때 물 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한다. 1914년 무양동 일부와 안동군 북선면의 외감애동 일부, 동후면의 나소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천동·오천리라 하여 예안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오천리는 3개 리로 구분되어 있다. 오천 1리는 군자리와 방잠의 일부, 오천 2리는 조마리, 이사, 우무실마을이고, 오천 3리는 양정, 신역, 당고개, 지삼마을로 되어 있다. 군자리는 근래에 조성된 광산김씨오천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600년 전통 마을이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2km 위인 현 위치로 종택, 묘우, 정자, 강당 등의 중요 건물들만 이건하였다.

광산김씨는 원래 전라도 광산에서 고려 후기에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그 한 파가 경상도 안동으로 와서 풍천의 구담, 와룡의 가구, 예안의 오천 등 세 곳에 뿌리를 내렸다. 오천의 입향 시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4~1534)로 풍산 도양골에 살다가 연산군 때 이곳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과 탁청정(濯淸亭) 김유(金綏, 1491~1555)는 중종 때 명신으로 가문이 융성해지는 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군자리로 불리게 된 것은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오천마을은 주민들 모두가 군자 아닌 사람이 없구나.”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특히 오천칠군자는 김연의 아들인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김유의 아들인 산남(山南) 김부인(金富仁), 양정당(養正堂) 김부신(金富信),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김효로의 외손인 봉화금씨(奉化琴氏) 일휴당(日休堂) 금응협(琴應夾),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 등의 7인을 가리키는 말로, 모두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이다.

읍청정의 주인 김부의(金富儀, 1525~1582)는 자는 신중(愼仲), 호는 읍청정(挹淸亭)이다. 김연의 둘째 아들이고 김부필의 아우이다. 이황에게 수학하여 경술과 도학으로 이름이 났는데, 동문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그를 제일류(第一流)로 인정하였다. 김부의는 유일(遺逸)로 추앙을 받아 참봉에 추천이 되었지만 부임하지는 않았고,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역학에도 밝아 이덕홍(李德弘)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했는데, 도수(度數)가 맞지 않아 돌아가지 않자 이황이 김부의에게 다시 제작하게 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김부의는 역동서원을 창건하는 데 큰 활약을 하였고, 이황이 산장(山長)을 맡게 해 선비를 양성하도록 하였다. 김부의는 성품이 매우 검소하여 50세가 넘어서도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자제들이 좋은 옷을 입는 것을 보면 “너희 할아버지께선 재상의 지위에 계셨으면서도 무명옷을 즐겨 입으셨는데 너희들은 한사(寒士)인 주제에 좋은 옷만 입으려 하니 도리가 아니다.”라며 타일렀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습(權習)의 딸이다. 아들은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이다. 김부의의 문집 『읍청정유고挹淸亭遺稿』는 『오천세고烏川世稿』 안에 실려 있는데, 불분권 1권의 얇은 문집으로 주로 시가 많은 편이고 소수의 편지, 묘지명이나 묘갈명 약간, 그리고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읍청정은 150cm 정도의 기단 위에 조성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집이다. 공간 구성은 정자마루 2칸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1칸 크기와 1칸 반 크기의 온돌방을 꾸몄으며, 좌측 방과 마루 앞에는 툇마루 3칸을 놓았다. 정자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마루의 전면에는 들어열개띠살 4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 들어 올려 2개의 들쇠로 고정시킬 수 있다. 전면과 측면에는 툇마루와 쪽마루로 구성하였고, 건물 전면의 툇마루와 쪽마루는 청판에 풍혈이 있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침락정의 주인 김광계는 자가 이지(以志), 호는 매원(梅園),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부친은 영남 의병대장을 지낸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이고, 모친은 진성이씨(眞城李氏) 이재(李宰)의 딸이다. 대암(大菴) 박성(朴惺)을 종유하였다가 나중에 안동부사로 부임한 한강 정구에게 『심경心經』을 질의하고 수학하였으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이처럼 김광계는 명망 있는 학자들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의 뜻을 단념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출사하지 않고 낙동강 가에 침락정을 지어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그러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 장현광에 의해 예안의병장에 임명됐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향촌사림에 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인솔해 북상하였으나 남한산성 함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는 김광계의 학행을 높이 사 여러 번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부인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이선악(李仙岳)의 딸이며, 아우 김광실(金光實)의 아들 김렴(金)을 후사로 삼았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매원유고梅園遺稿』가 『오천세고烏川世稿』 속에 들어 있다. 김광계의 묘소는 안동 거인산에 있다.

침락정은 정자보다는 정사의 형태에 가깝다. 마루보다 방의 비중이 더 크며 정자가 가지고 있는 누마루 같은 것도 없다. 그저 마루방이 건물 가운데 위치하고 건물은 남향하여 서 있다. 동쪽과 서쪽과 남쪽 세 방향으로 낮은 쪽마루를 가설하였고, 잡석 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초석과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 5량 가구에 팔작지붕의 형태를 지녔다. 정면은 4칸인데,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이고, 동쪽 1칸과 서쪽 1칸은 온돌방이 배치된 중당협실형 건물이다. 동쪽 1칸의 앞면 벽과 서쪽 1칸의 앞면 벽에는 통상 크기의 2쪽 방문이 붙어 있다. 방의 뒷벽에는 문이 없다. 정면의 중앙 2칸은 온 벽이 다 4쪽의 긴 방문으로 막혀 있다. 방문의 아래쪽 3분의 1 부분은 판자로 막혀 있고 그 위쪽은 격자무늬 문살이다. 마루에는 판문을 달아 외부와 구분하였다. 우측 계암정 방향에서 침락정으로 들어오는 일각문은 위아래가 타원으로 되어 있는 궁륭(穹窿)형 테두리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침락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조당의 주인 김부필은 자가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이며 부친은 운암(雲巖) 김연(金緣, 1487~1544), 모친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치당(曺致堂)의 딸이다. 부인은 진주하씨(晉州河氏) 하취심(河就深)의 딸이다. 김부필은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정치적 포부를 키웠다. 그러나 부친상(29세), 인종의 승하(30세), 조모상(33세), 모친상(41세) 등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를 가정사로 인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후 출사의 포부를 단념하고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6년(51세) 사관, 1568년(53세) 효릉참봉, 1569년(54세)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황은 김부필이 축적한 학문의 경지를 인정하며 출사를 권유하였지만, 김부필은 도리어 거처에 후조당이라 편액하고 자신의 지향을 밝혔다. 이에 이황은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김부필의 지조에 대해 칭송하였다.

후조당 주인은 본래부터 절개 굳세어
임명장 도착해도 기뻐하는 마음 없네
빙설 속에 피어난 매화 향과 마주 앉아
도의 근원 깨닫고 읊조리길 그치지 않네

後凋主人堅素節
除書到門心不悅
坐待梅花氷雪香
目擊道存吟不輟

이와 같이 이황은 김부필이 맑은 풍모와 곧은 절개를 지키며 처사적인 인간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김부필 역시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문하의 동문들과 이황의 저술을 모아 책으로 편찬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편 도산서원을 건립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추진하였다. 1822년(순조 22)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1824년(순조 24) 스승 이황과 똑같이 문순(文純)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으로 6권 3책의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이 있다.

후조당은 광산 김씨 예안파 종택의 별당으로, 종택은 별당, 정침, 사당, 재사,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정침에 부속된 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집이다. 평면은 서쪽의 6칸 대청에 동쪽의 2칸 온돌방을 결합하여 몸체로 삼고, 다시 2칸 온돌방에 남쪽으로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을 차례로 붙여 익랑(翼廊)을 만들어 전체가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도록 하였다. 정침 왼쪽 담장 안에 있으며, 정침으로 통하는 협문과 정문을 갖추었고 왼쪽에는 사당으로 통하는 신문(神門)이 있다.

참고문헌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명현당호』, 안동민속박물관, 2000.
  •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권오영, 「오천 7군자의 학문활동과 사상」,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
  • 권진호, 「후조당 김부필의 삶과 시세계」, 『국학연구』 제30집, 한국국학진흥원, 2016.
  • 권진호, 『국역 매원유고』, 성심, 2006.
  • 안병결 외, 『군자리, 그 문화사적 성격』, 토우, 2001.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