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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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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 주소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북촌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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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豊山柳氏 河回마을 和敬堂(北村))


풍산류씨(豊山柳氏)는 풍산현(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의 토성으로 고려 후기에 성장한 전형적인 재지사족이다. 시조인 류절(柳節)로부터 류돈승(柳敦升), 류정장(柳挺莊) 3대에 걸쳐 호장을 역임하였다. 4세인 류백(柳伯)이 은사급제함으로써 토대를 마련하였고, 5세인 류난옥(柳蘭玉)이 창평현령을 역임함으로써 그 토대를 다졌다. 뒤를 이어 6세 류보(柳葆), 7세 류종혜(柳從惠)가 잇달아 실직을 역임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류종혜 때부터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정착하여 하회는 풍산류씨 가문의 세거지가 되었다. 풍산에 살던 류종혜가 서쪽으로 10여 리를 옮겨 하회로 들어오려 할 때 입향이 쉽지 않았던 것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류종혜의 조부인 류난옥이 먼저 하회에 입향하고자 했으나 적선을 한 뒤라야 들어갈 수 있다는 계시에 따라 류종혜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음덕을 쌓았다는 전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류종혜가 3년 동안 만인에게 적선을 하고 나서야 입향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하회로 옮겨온 풍산류씨는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일족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가세는 더욱 부유해졌다. 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은 진사 김관(金琯)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김관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부친이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부이다. 그러므로 류홍은 김숙자와 처남 매부 간이고 김종직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권옹(權雍)의 사위가 되었는데, 권옹은 이조정랑 배소(裵素)의 사위이며 평창군사를 지낸 관료였다. 류소의 아들 류자온(柳子溫)은 사간 안팽명(安彭年)에게 글을 배우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의 장인은 청백리로 유명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으로 연산군 때 대사간을 지내다가 낙향하여 안동 풍산에 은거한 명사이다. 류자온의 아들 류공작(柳公綽)은 간성군수를 지냈으며 연안이씨(延安李氏) 이형례(李亨禮)의 사위였다. 이형례는 대제학을 지낸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의 조부이다. 이와 같이 류종혜로부터 류공작에 이르기까지 하회 류씨들은 조선 전기 영남 지역이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가능한 최정상급 혼맥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혼맥이 결국 류씨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고, 16세기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1573),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 1539~1601)·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부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발돋움하였다.

류이좌는 서애 류성룡의 8대손으로,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류사춘, 모친은 연안이씨(延安李氏)이다. 초명은 원래 태조(台祚)였는데, 정조의 명에 따라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좌(台佐)로 고쳤다. 1763년(영조 39) 외가인 서울의 나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백부인 외재(畏齋) 류종춘(柳宗春)에게 수학하였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에게 문재를 인정받았다. 1792년(정조 16) 임오의리를 천명하는 영남만인소에 참여하여 만인소 작성 과정의 전말을 기록한 『천휘록闡揮錄』을 남겼다. 1794년(정조 18)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김해부사, 한성부우윤,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초계문신에 발탁되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 지방관 시절 학당을 짓거나 자신의 봉록을 보태어 지방 교육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각종 세금 문제를 제기하여 백성들의 고초를 덜어주고자 힘썼으며, 『번암집樊巖集』 간행을 주도하여 1824년(순조 24) 봉정사에서 간행하였다. 1837년(헌종 3) 화경당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77세였다.

류도성은 서애 류성룡의 10대손으로, 자는 선여(善汝), 호는 석호(石湖),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부친은 류희목(柳希睦), 생부는 류기목(柳祈睦), 모친은 진성이씨(眞寶李氏) 이태순(李泰淳)의 딸이다. 1823년(순조 23) 12월 28일에 태어났으며 5세 때 조부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에게 『효경』을 배웠고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1813~187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향촌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그러다 1882년(고종 19) 59세에 성공감역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추천으로 경상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또 안동 유림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인 병호시비(屛虎是非)를 해결하기 위해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종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협의하여 1888년(고종 25) 봄에 위차 문제를 매듭짓고 합의문을 이끌어 내었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시행되자 사신 이규진이 왕명을 받들고 왔을 때 “삭발은 임금의 참뜻이 아니리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털은 자르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눕자 어쩔 수 없이 이규진이 돌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의병장에 추대되어 의병에 참여하였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비분강개한 어조로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였다.

한편, 류도성의 증조부 류사춘(柳師春, 1741~1814) 대에 이르러 하회 충효당에서 분가하여 작은 초가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화경당’의 시작이다. 류사춘은 차츰 가계를 일구어 새로 집을 짓고 부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만수당(萬壽堂)이라 편액하였다. 1797년(정조 21) 류사춘의 아들 학서 류이좌가 만수당을 중수하고 화경당이라 편액하였고, 1862년(철종 13) 그의 손자인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1823~1906)이 큰사랑, 사랑, 대문채를 건립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수신와는 바로 화경당(북촌댁) 본채의 남쪽 사랑채를 일컫는다. 류도성이 화경당을 증축할 때의 일화가 있다. 1859년(철종 10) 화경당의 큰사랑과 사당을 짓기 위해 봉화 춘양에서 좋은 목재를 구해 강변에 적재하여 말리고 있는데, 강 건너 부용대 쪽에서 상갓집에 조문을 갔다 오던 일가 수십 명이 탄 배가 큰 홍수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에 류도성은 재목 일부를 강물에 뗏목으로 밀어 넣어 붙잡아 살리고 나머지는 불을 질러 어둠을 밝혀 수많은 목숨을 구하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4호인 하회마을 화경당고택은 양진당과 더불어 북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하회마을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흔히 북촌댁이라 불린다. 편의를 위해 인위적인 변화를 구하지 않고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였는데, 안채는 뒤뜰의 경사진 지맥 탱화산에 기대어 경사 방향에 따라 동향으로 화산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별당채 북촌유거는 사고석 바른층 쌓기의 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정면 7개, 후면 7개, 대청 중간 1개는 모두 두리기둥들이며 홑처마의 팔작집이다. 북측이 경사져 있어 축대를 쌓은 뒤 북쪽에 앉혀 남향하도록 하여 방에서는 부용대와 화천, 마루에서는 화산의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배치 평면도를 보면 이웃에 대한 배려도 살펴볼 수 있다. 보통의 양반 가옥과는 차별화된 특이점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대문채 우측 담에 붙여 건물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측간을 지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쉽게 측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건물 뒤편에는 300년 된 소나무가 있는데, 증조부 류사춘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가져다 심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문채는 중간에 솟을대문으로 통로를 만들고 좌우 각각 3칸으로 된 구조로 마구간으로 쓰는 우측 끝 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에 방을 만들지 않고 헛간과 유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보통 양반가의 경우 대문채에 노비를 기거하게 했으나 화경당은 대문채에 노비가 기거하는 방을 없애 버려 노비들이 담장 밖에 거처하면서 아침 일찍 주인집으로 와서 일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각자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이하노비(籬下奴婢)를 운용하였다. 노비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그들의 가정생활을 배려한 사례다. 이렇듯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이웃과 노비를 배려하여 지은 화경당은 조화와 배려라는 유교적 가치를 건축으로 구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 류이좌, 「화경당기」, 『학서집』, 권10.
  • 권진호, 「유교현판이야기 4편-하회마을 충효당」, 안동MBC.
  • 김수현, 『풍산류씨 화경당』, 한국국학진흥원, 2014.
  • 김형수, 『풍산류씨 충효당』, 한국국학진흥원, 2009.
  • 이세동, 『충효당 높은 마루, 안동 서애 류성룡 종가』,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1.
  •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