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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고씨 월봉종택開城高氏 月峯宗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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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개성고씨 월봉종택開城高氏 月峯宗宅
  • 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녹문길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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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고씨 월봉종택開城高氏 月峯宗宅
관련편액 추원사(追遠祠)

개성고씨 월봉종택開城高氏 月峯宗宅



고인계(高仁繼, 1564~1647)는 본관이 개성(開城), 자가 선승(善承), 호가 월봉(月峯)이다. 개성고씨(開城髙氏)는 양경공(良敬公) 고영신(高令臣)이 고려 문종조에 현달하여 청렴과 검소로 칭송되니, 고씨가 드디어 이름난 가문이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고영(高瑛)은 판도판서가 되었고, 그의 아들 고사원(高士原)은 조선 초에 벼슬이 예문관직제학에 이르렀으며, 고인계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부 고수연(高壽延)은 호분위장이다. 증조부 고극검(高克儉)은 승의부위이다. 조부 고윤종(高允宗)은 조봉대부 서부주부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고흥운(高興雲)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고성군수에 이르렀으며 승정원도승지에 증직되었고, 차남 고경운(高慶雲)은 전력부위이다. 고인계는 전력부위공 고경운의 아들이지만, 백부 승지공 고흥운의 양자로 입계하였다.
1605년(선조 38) 비로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06년(선조 39) 명경과에 장원급제했다. 1609년(광해군 1) 성균관학유를 거쳐서 학록 겸 태상시봉사·학정·박사로 승진했다. 1611년(광해 3) 6월에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연서찰방에 제수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이 공의 이름을 듣고 사모했다. 공을 잘 알던 어떤 객이 심부름꾼을 보내 공의 뜻을 묻기를 “이판서께서 그대를 한 번 뵙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공이 대답하기를 “시골에 있는 미천한 사람이 어찌 함부로 권문(權門)에 이르겠습니까.”라고 했다. 다른 날 또 와서 말하기를 “예조낭관에 빈자리가 생겼는데, 승진을 위해서는 처음에 이 자리에 오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이 이에 정색하며 말하기를 “예조는 높은 벼슬로 가는 계단이니, 어찌 내가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객은 겸연쩍어 일어나 나갔다. 며칠이 지나 결국 연서찰방에 의망되었다가 또 어떤 일로 인해 제지되어 파직되었다. 1612년(광해군 4) 6월에 휘호(徽號)를 올리는 데 참여하여 도감낭청이 되었으며, 10월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벼슬에 나가려는 뜻을 끊고 영강 가에 집을 지어 기거하면서 시를 지으며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 것이 거의 10여 년이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전적에 제수되고 형조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1624년(인조 2) 봄에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사가 되었다가 겨울에 귓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호련록(湖蓮錄)』 1권을 저술했다. 1626년(인조 4)에 형조정랑이 되었다가 조금 뒤에 예안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뒤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뒤 공조정랑·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45년(인조 23)에 80세로 대질(大耋)의 반열에 올라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1647년(인조 25) 6월에 병으로 운명하니 향년 84세였다. 선영 동쪽 수백 보 떨어진 영강 가 임좌지원(壬坐之原)으로 장례 지냈으며, 부인 채씨(蔡氏)와 합장했다.
월봉 고인계는 사람됨이 조용하면서도 장엄하고 온화하였으며 기량이 컸다. 평소 말을 빨리하거나 당황하는 얼굴빛이 없었고, 자신을 단속하거나 남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참됨·신실함·너그러움·중후함을 위주로 했으며, 담박하게 자신을 지켜 영욕과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성년이 되어 처음 벼슬했을 때 이이첨이 객을 보내 가늠해보았으나, 곧바로 사절하였다. 인조반정 초기에 무릇 권간들에게 배척을 당한 자들은 모두 높은 관직에 제수되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지만, 그는 일찍이 이런 일을 남에게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대개 그는 명성을 숨기고 물러나 묵묵한 것이 이와 같았기에 또한 ‘남들보다 한 등급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시를 지을 때 조탁(彫琢)을 힘쓰지 않아 저절로 충담한 지취가 있었다.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녹문리는 서쪽으로 금천이 흐르며 넓은 평야가 분포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갱빈, 구야, 기산, 녹문, 서리기 등이 있다. 갱빈은 약 100여 년 전에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이주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된 곳이다. 금천강변에 있는 부락이라 하여 갱빈 또는 금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야는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곳에 구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구야라고 하였다 한다. 기산은 약 150여 년 전 홍박천이라는 사람이 생활의 근거지를 찾기 위하여 각지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주위의 잔디가 너무나 아름다워 신을 벗어놓고 이곳을 정착지로 결정하고 지명을 기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녹문은 약 100여 년 전 진사(進士) 고성겸(高聖謙)의 문하생들이 스승의 호를 따서 부른 지명이다. 서리기는 옛날부터 산은 높지 않으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물은 깊지 않으나 맑게 흘러서 사슴이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서록리라 불리던 곳이다. 그 후 서록리가 변음되어 서리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고인계(高仁繼), 『월봉문집(月峯文集)』
  • 유교넷(http://www.ugyo.net/)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