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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이가당(固城李氏 二可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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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고성이씨 이가당(固城李氏 二可堂)
  •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청각길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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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이가당(固城李氏 二可堂)
관련편액 이가당(二可堂)

고성이씨 이가당(固城李氏 二可堂)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으로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혁혁한 가문을 형성하였다. 그 시조는 이황(李璜)인데,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추원록(追遠錄)』에는 한나라 문제 때의 사람인 이반(李槃)의 24대손이라는 기록이 있고, 『만성보(萬姓譜)』에 의하면 밀직부사로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성이씨를 철성이씨(鐵城李氏)라고도 부르는데, 살아서는 본관(本貫)을 고성으로 쓰고, 죽어서는 철성으로 쓴다. 고성이씨 문중에서 철성을 본관으로 함께 쓰는 까닭은 고려 충선왕 때 문과 출신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공신 칭호를 받고 철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이암은 서법(書法)에도 일가를 이루어 중국에서조차 ‘동방의 조맹부(趙孟頫)’라고 칭송되었다.
이시방(李時昉, 1674~1739)은 본관이 고성(固城), 자가 회수(晦叟), 호가 이가당(二可堂)이다. 이황이 시조이고, 문정공 행촌 이암과 양헌공 용헌(容軒) 이원(李原)이 현조이며, 비안현감으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이증(李增)이 입향조이며, 좌랑으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임청각(臨淸閣) 이명(李洺)이 분파조이다. 고조 박산정(博山亭) 이지(李遲, 1560∼1631)는 공조참의를 지냈고, 증조 이종배(李宗培, 1603~1633)는 충의위이다. 조부 이분(李蕡)은 선교랑을 지냈고, 부친 이후영(李後榮, 1649~1712)은 문과에 급제한 뒤 군수를 지냈다.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감사 이명익(李溟翼)의 딸이다. 이시방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성이 비범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그 뜻을 잘 받들었다. 형제간에는 은의가 지극했다. 문사(文詞)는 간결하게 하고자 했고 행실은 굳세고 발랐으며 옳지 않은 것을 보면 이를 준엄하게 지적해 그로 하여금 그것을 고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를 공경하고 겁내는 이들이 많았다. 계유년에는 선대부(先大夫)를 배향해 고성 임소까지 가 풍악산에 올라서 산해의 경치를 실컷 보고 돌아왔다. 이듬해에 숙부인의 상을 당해 초상과 제반 상례에 있어서 허물이 없게 했다. 일찍이 박사업을 준비해 여러 번 향해에 합격했으나 예부 시험에 들지 못하자 결연히 이를 그만두고 집을 짓고는 ‘이가’라 편액을 걸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였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영특한 성품에 당당한 풍채였고
문장은 간결했고 행동은 방정했다네.
이 어찌 사실과 달라서 선대를 속이는 말이랴.
이는 또한 대대로 내려온 평을 따른 것이라네.

법흥고가도 아래의 지하도 입구에서 길을 건너 동쪽으로 약 30m쯤 올라가면 법흥 건널목이 나온다. 법흥 건널목은 현재 사람이 다닐 수 없게 폐쇄되었지만 법흥고가도와 지하도가 생기기 전에는 안동의 동쪽과 서쪽을 이어 주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건널목 부근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영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가당(二可堂)이 보인다. 이가당에서 우측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는 임청각(臨淸閣) 정침(正枕) 군자정(君子亭)이 자리 잡고 있다. 영조 때 이시방이 임청각에서 분가하여 정침(正寢)과 별사(別舍)를 지어 여기에서 학문을 수학하고 ‘이가당’이라 편액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중앙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정침과 별사가 철거되어 후손들이 현 위치에 정사를 옮겨지었다. 정자는 남향이며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낙동강과 반변천의 합수는 예로부터 아름다워 ‘영가(永嘉)’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전면에 반 칸 넓이의 퇴칸을 설치한 후 어칸에 대청을 만들고, 좌우 협칸에 온돌방을 꾸몄다. 정자의 전면과 측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한 후 청판에 풍혈(風穴)이 있는 난간을 둘러 이동의 편리함과 정자의 품격을 살렸다. 대청은 크기가 1칸 반으로 전면의 주간(柱間) 전체를 사분합 띠살문으로 달아 들어 올려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청으로서의 기능을 살렸다. 내부에는 바닥에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을 연등천장으로 구성하였으며, 좌우 측면의 방과 만나는 주간에는 삼분합문을 달았다. 대청 좌우의 방은 크기가 각각 1칸 반으로 측면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배면의 중방과 상인방 사이의 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참고문헌
  • 이승규(李承奎), 「이시방묘갈명(李時昉墓碣銘)」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