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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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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 주소 울산 북구 박상진5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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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밀양박씨 경헌고택(密陽朴氏 敬軒古宅)



박시준(朴時駿, 1874~1942)의 자는 운경(雲卿), 호는 양정재(養正齋)이고, 생부는 박희복(朴喜復)이다. 숭덕전참봉을 지냈고, 성품이 강직하고 일을 처리함에 청렴하고 간명하였다. 송정동 집 곁에 양정재(養正齋)를 건립하여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경헌고택은 울산시 북구 송정동 일대에 세거한 밀양박씨(密陽朴氏) 송정문중의 일원이다. 밀양박씨의 시조는 박혁거세이며,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은 밀양박씨의 관향조로서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8왕자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밀성대군에 봉해졌다. ‘밀성’이란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옛 지명이다. 중조인 밀성부원군 박언부(朴彦孚)는 밀성대군 박언침의 7세손이며 고려 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며 최충과 함께 태사를 지낸 후 중서령, 문하시중, 도평의사사를 지내고 밀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 밀직부원군파 파조인 박중미(朴中美)는 밀성부원군 박언부의 8세손으로 호가 죽은(竹隱)이다.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중서령 등을 역임하였고, 공민왕 10년에 안유,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 난을 평정한 공으로 밀직부원군에 봉해졌다. 밀양박씨가 울산으로 이거해온 것은 1664년(현종 5)이다. 괴천(槐泉) 박창우(朴昌宇, 1636~1702)와 이휴정(二休亭) 이동영(李東英, 1635~1667)은 17세기 남인의 영수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제자로 인연을 맺어 호형호제하며 지낸 사이이다. 괴천은 이휴정의 초청으로 울산의 예문을 가르치는 예사로 초빙돼 와서 밀양박씨의 울산 입향조가 되었다. 박창우는 죽재(竹齋) 박사신(朴士愼)의 손자이고 박현(朴晛)의 아들로 영천 괴하리에서 출생하였다. 1666년(현종 7)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생원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주역(周易)』에 대하여 뛰어난 능력을 갖춘 그는 고려 때 역동으로 불린 우탁에 견주어 ‘역남선생(易南先生)’이란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괴천문집(槐泉文集)』 2권 1책과 『주역집해(周易集解)』 3권이 있다.
박창우의 둘째 아들은 하계(何溪) 박세도(朴世衜, 1651~1727)로, 이후 박천보(朴天普, 1682~1756)-박이충(朴履忠, 1719~1770)-박성창(朴性昌, 1752~1823)-박사유(朴思裕, 1795~1865)로 이어진다. 박사유의 아들 박정복(朴定復, 1842~1923)은 자가 경삼(景三), 호가 경헌(敬軒)이다. 순릉참봉을 지냈으며, 밀양박씨 송정문중 경헌고택의 주인이다. 경헌 박정복의 가문은 양정재 박시준, 창릉 박용진(朴墉鎭)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밀양박씨 송정문중 후손 가운데 은포 박사유는 아들 5명을 훌륭하게 양육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 가운데 장남 박용복(朴容復)은 진사시에 입격하고, 손자 박시룡(朴時龍)과 박시규(朴時奎)는 문과에 급제하고, 박시구는 진사시에 입격하여 송정문중을 세상에 드러내었다. 순릉참봉을 지낸 박정복의 아들은 숭덕전 참봉 박시준인데, 조모와 선친의 묘소 아래 우경재(寓敬齋)와 우사정(又思亭)을 지어 봉선에 정성을 다하였고, 경헌고택 곁에 양정재를 건축해 자제들을 교육하거나 손님을 응접하였다. 박시준의 아들 박용진은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의 재종제로 가학을 계승하고 전수하였으며 도산서원 원장을 지냈다. 한편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이 종숙 박시준에게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엽전 스물아홉 냥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한문 초서체의 친필 서찰이 발견되어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시준이 우사정을 건립하고 지은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先君思又不肖思 선친께서 조모를 그리워했고 나도 선친을 그리워하여
嗟緩斯亭志事追 아, 늦게서야 정자 세워 추원하는 뜻을 펼치네
甄氏梓松墟墓感 진씨는 나무로 뒤덮인 무덤터를 보고 감정을 일으켰고
班家藟葛夢神貽 반고는 칡넝쿨 우거진 고향을 지키라는 꿈을 꾸고 경계하였네
此生三釜終無及 나는 박봉이어서 끝내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으나
來裔繁椒庶有期 후손들은 번성하니 아마 기대할 수 있으리라
創始守終難也易 정자를 짓기는 쉬워도 끝까지 지키기가 어려우니
顧名世世此心持 정자 명칭 돌아보며 대대로 이 마음 지녔으면

3구는 진사도(陳師道)가 지은 「사정기(思亭記)」의 “높은 곳에 올라가 무덤 사이에 서 있는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바라보고 언덕을 내려와 오래된 무덤 사이를 지나다가 가시덤불이 무성하고 새로 난 여우와 토끼 발자국을 보게 되면, 그 누가 어버이의 생각을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을 변용하여 표현한 말이다. 4구는 『한서(漢書)』를 지은 동한의 반고(班固)가 꿈속에서 신선이 갈대로 뒤덮인 고향의 험준한 골짝을 지키라고 하여 이를 따랐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5구의 삼부(三釜)는 6두(斗) 4승(升) 들이의 용량(容量)을 말하는바, 삼부는 곧 일반인이 겨우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는 용량에 불과한 것으로, 전하여 박봉(薄俸)에 비유한다. 『장자(莊子)』 「우언(寓言)」에 “증자가 두 번 벼슬을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변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어버이 생존 시에 벼슬할 적에는 삼부의 녹봉만 받아도 마음이 즐거웠는데, 뒤에는 벼슬하여 3천 종의 녹봉을 받았지만, 어버이를 봉양할 수 없어 내 마음이 슬펐다.’ 했다.[曾子再仕 而心再化 曰吾及親仕 三釜而心樂 後仕三千鍾 不曁 吾心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문헌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목록집 27 밀양박씨 경헌고택』, 2015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1』, 한국국학진흥원, 2016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 유교넷(http://www.ugy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