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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씨 사직공파 마암문중(禮安李氏 司直公派 磨巖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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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예안이씨 사직공파 마암문중(禮安李氏 司直公派 磨巖門中)
  • 주소 안동시 와룡면 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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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씨 사직공파 마암문중(禮安李氏 司直公派 磨巖門中)
관련편액 오헌(梧軒)

예안이씨 사직공파 마암문중(禮安李氏 司直公派 磨巖門中)


예안이씨(禮安李氏)는 전의이씨(全義李氏)에서 분적된 성씨로, 예안이씨 마암문중(와룡파종택)은 고려 벽상삼한첨의정승을 지낸 이익(李翊)의 후손이다. 전의이씨 시조 고려개국공신 이도(李棹)의 6세손 이천(李仟)의 아들 3형제 중 둘째인 이혼(李混, 1252~1312)이 첨의정승을 지내고 예안백에 봉군되었다. 이혼의 손자 이익(李翊) 또한 보문각제학에 올라 예안백으로 봉군되어 이때부터 예안으로 분적했다고 한다. 이익의 손자로 전리판서를 지낸 이송(李竦)의 아들 백곡(栢谷) 이천(李蕆, 1376~1451)이 예안으로, 중종 연간에 이익의 6세손 이영(李英)이 풍산으로 입향하였다. 예안으로 입향한 이천은 장영실과 함께 갑인자의 주조사업을 감독하고 대간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을 제작하는 등 과학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왜구와 여진족 소탕에도 공을 세워 무인으로서도 활약하였다. 1410년(태종 10) 무과 중시에 급제한 후 동남연해에 출몰하는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이후 이대인(李大仁) 대에 와서 지금의 안동 예안면 말바우[馬巖]에 살게 되었다. 이대인은 죽헌(竹軒) 정두(鄭枓, 1508∼1576)의 사위가 되어 처가 동네인 이곳에 살게 되면서 와룡 말바우 입향조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이성일의 고조부이다.

이성일의 자는 명거(明擧), 호는 오헌(梧軒),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부친은 원표(元標)이다. 그는 문예를 일찍 성취하여 이미 약관에 유림의 촉망을 받았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발탁되었으나 답안지의 격식에 위배되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이에 동료들이 탄식하고 애석해 하자 그는 “명리를 다투어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물러나 본분을 지키면서 선조의 검약하라는 훈계를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내려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데 전력하여 예로써 몸을 다스리고 본원을 함양하며 후생을 가르쳐 법도에 따라 실행하도록 하였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동애(東厓) 이협(李浹, 1663~1737) 등과 도의로써 교제하였고 은미하고 오묘한 것을 강구하여 계발하는 바가 많아 남방의 학자들이 이성일을 추대하여 사표로 삼았다. 한편 이성일은 안동좌수의 직임을 맡아 향약을 닦고 향안을 정비했으며 교과 과정을 엄하게 수립하여 온 고을을 편하게 하였다. 또 의국의 책임자가 되어서는 치료법을 널리 베풀고 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혼탁한 사류의 관습을 바로잡아 일에 따라 조치하여 정체되지 않도록 힘썼다. 사후에 마암사에 제향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말바우[馬巖] 마을은 와룡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2.5km쯤 가면 길 좌측에 안동소주 홍보관이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 길로 진입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말바우마을이다. 이 마을은 청주정씨(淸洲鄭氏)와 예안이씨들이 대대로 세거해 온 마을로 약 400년 전 첨정을 지낸 죽헌(竹軒) 정두(鄭枓, 1508∼1576)가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정두는 원래 지금의 와룡면 지내 2리의 모산에 살았으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연산군 말엽에서 중종 연간에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또한 예안이씨들이 이 마을에 살게 된 것은 이대인(李大仁) 때부터인데 그가 정두의 사위가 되어 처가 동네인 이곳에 살게 되어 예안이씨 와룡 입향조가 되었다. 청주정씨(淸州鄭氏)가 이 마을에 입향할 때의 전설이 마을에 전한다. 죽헌 정두가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로 결심하고 집터자리를 둘러보니 수백 년의 터전이 될 만하였다. 그러나 큰 바위를 옮겨야 했는데 옮길 방도가 없어 밤낮으로 걱정하였다. 그러던 차에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내일 이 앞으로 어떤 초립동(草笠童)이 말을 타고 지날 터이니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면 치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과연 꿈속 노인의 말대로 초립동이 지나가 정성을 다해 대접하였더니 초립동은 말에게 죽을 배불리 먹인 뒤 큰 바위를 번쩍 들어 말 등에 싣고 동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바위를 실은 말이 얼마 못 가 넘어지면서 말이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사람들은 말이 옮기다만 그 바위를 말바우, 말죽통을 버린 논을 통배미, 말삼정을 버린 곳을 삼정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있는 오헌은 시멘트로 정리된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그 뒤에 각주를 세운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평면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우측에는 1칸의 방과 그 앞에 1칸의 마루를 만들었으며 좌측은 2칸의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붙어 있다. 인근에 종택과 후학들이 이성일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李明翔, 「梧軒記」
  • 『안동의 현판(上)』, 안동민속박물관, 2004.
  • 김복영, 「예안이씨」, 디지털안동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