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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낙음재(光山金氏 洛陰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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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명 광산김씨 낙음재(光山金氏 洛陰齋)
  • 주소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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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낙음재(光山金氏 洛陰齋)
관련편액 낙음재(洛陰齋)

광산김씨 낙음재(光山金氏 洛陰齋)


낙음재가 자리 잡은 구담리는 원래 풍산현에 속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예천군 용궁면 신상면 암천리의 일부와 예천군 호명면 금릉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구담동이 되었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안동군 풍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에 안동군이 안동시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 구담(九潭)은 이 지역에 낙동강이 흘러 생긴 9개의 깊은 소(沼)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남의 것을 탐낸 적이 없는 마음씨 착한 노인이 장성한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들 부자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남의 집 머슴으로 삶을 지탱해 갔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닥쳐 그해 농사를 망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어도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곳을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장소 일곱 곳을 정하여 파내려 갔지만 어느 곳에서도 물은 솟지 않았고 오히려 웅덩이를 파다가 그만 착한 아들이 흙더미에 깔려 압사하는 큰 사고가 났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실망하여 일손을 놓았다. 그러나 노인은 홀로 여덟 번째 웅덩이를 파내려 갔으나 이곳 또한 물이 나지 않았다. 노인은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는데 홀연히 백발노인이 나타나 “뒷산 고목나무 옆에서 100보 떨어진 곳에 웅덩이를 파보아라.”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꿈에서 깬 노인은 너무나 생생하여 백발노인이 가리켜준 곳을 파니 놀랍게도 굵은 물줄기가 솟아 못을 이루어 가뭄을 면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못이 남아 있으며 못이 아홉 개나 있다고 하여 구담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에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건설로 예전의 소는 찾을 수 없고, 자연습지가 만들어져서 생태계의 보고로 많은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구담리는 순천김씨(順天金氏)와 광산김씨가 집성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광산김씨가 구담에 입향한 것은 담암(潭庵) 김용석(金用石) 때다. 김용석은 1472년(성종 3) 성균진사가 되었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스승 김종직(金宗直)과 동문인 김일손(金馹孫),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이 화를 당하자 부인 순천김씨의 고향인 안동 구담으로 내려와 살았다. 김기영은 김용석의 10세손으로, 부친은 만국(晚菊) 김두환(金斗煥)이고, 모친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박광호(朴光浩)의 딸이다. 김기영은 10세에 부친에게 학업을 전수받았으며, 14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로는 종백형(從伯兄) 노계공(老溪公)에게 수학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란이 일어나자 모친을 모시고 문경의 주흘산으로 피신했다가 이듬해 다시 구담으로 돌아왔다. 1906년 모친상을 당해 상을 마친 뒤로는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석호(石湖) 류도성(柳道性), 전원(田園) 류도헌(柳道獻) 등을 종유하였다. 김기영은 특히 자녀들의 잦은 병치레로 인해 『소아방小兒方』과 같은 의약서를 연구해 자식에게는 물론 고을 사람들의 병구완에 도움을 주었다. 부인은 부림홍씨(缶林洪氏) 홍범모(洪範模)의 딸로 홍귀달(洪貴達)의 후손이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재정(金在楨), 김재경(金在敬), 김재휘(金在彙), 김재근(金在謹), 김재도(金在道)이고, 사위는 장덕문(張德文), 정진진(鄭鎭津)이다. 김기영의 묘소는 구담의 탑산(塔山) 남쪽 술좌(戌坐) 언덕에 있다. 저술로 4권 2책의 『낙음유고洛陰遺稿』가 있다.

낙음재는 크게 ㅁ자 구조이며, 안채와 사랑채인 낙음재는 평행으로 놓여 있다. 낙음재는 약 1.5미터의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 가구로, 뜰에서 낙음재로 오르기 위해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계단을 사이로 낙음재가 있는 기단 앞에는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낙음재의 정면은 모두 툇마루를 설치했다. 낙음재의 가장 서쪽 칸은 예전 쇠죽을 끓이고 여물을 저장해둔 장소였는데, 현재 3면이 트인 마루로 개조됐다. 가운데 2칸은 각각 방이며, 오른쪽 1칸은 마루방이다. 이 마루방의 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했다. 낙음재의 서편에는 원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와 하인이 머무는 고방이 있었는데, 1962년에 이곳을 허물고 2칸의 양옥을 만들었다. 이 양옥은 서편은 2층, 동편은 1층으로 되어 있으며, 낙음재와 출입문을 연결했다. 그러다 2009년경 양옥과 한옥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모여 양옥을 허물고 현재는 빈 터로 남겨 두었다. 낙음재 가장 서쪽 칸의 마루는 양옥이 허물어진 뒤에 개조되었고, 낙음재의 서편 계단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약 70cm의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5량 가구로 되어 있다. 서편에서부터 부엌-안방-대청-신혼방의 역할을 한다. 안채와 낙음재 사이의 동편에는 예전 곡식을 저장하던 2칸 크기의 곡식창고가 있었으나, 2009년 현대식 화장실로 개조했다. 낙음재와 안채 사이의 서편에는 3칸의 건물이 있어 가운데 부엌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외양간, 오른편에는 식모가 거주하던 곳이었다. 낙음재로 통하는 대문은 철제 양문으로 되어 있다. 앞선 양옥 앞의 뜰에는 못을 만들고 수양버들 등을 심었으나 지금은 메워 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김기영, 『낙음유고』, 경인문화사, 1999.
  • 김주현 역, 『국역 낙음유고』, 우승인쇄, 2007.
  • 안동시 풍천면사무소(www.andong.go.kr/csc/pungch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