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 남흥문중
남휘주(南暉珠, 1326∼1372)의 자(字)는 안명(岸明)이다.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기철(奇轍)과 권겸(權謙)의 역모를 토벌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남민생(南敏生, 1348∼1407)의 자(字)는 추원(追遠)이다. 고려 때 문음(門蔭)으로 무과(武科)에 선발되어 위위소윤(衛尉少尹)을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이르러 공께서 세가구신(世家舊臣)으로 초야로 물러나 고려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키고 있었다. 1403년(태종 3) 조선 조정의 부름을 받고 평해군사(平海郡事)로 제수되었다.
남민생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5형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남부량(南富良)은 삼척진병마검절사, 남수량(南遂良)은 중령호군, 남의량(南義良)은 수위교위, 남우량(南佑良)은 회령도호부사, 남보량(南普良)은 만호를 역임했으며 사위 황재(黃裁)는 현감, 배남(裴楠)은 정랑이 되었다. 1478년(성종 9) 안동의 일부 사족의 원로 13명이 결성한 우향계(友鄕契)에 남민생의 손자 남치정(南致晶)과 남치공(南致恭), 증손 남경신(南敬身)과 남경인(南敬仁)이 참가하여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이루었고, 이들 후손들이 현재 안동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남의량의 손자 남팔개(南八凱), 남팔준(南八俊) 형제가 현재의 일직면 망호2리로 이거하고 남항년(南恒年), 남창년(南昌年) 형제가 일직면 원리에 이거하였으며 남팔개의 증손 허영정(許亭) 남응원(南應元, 1539~1611)은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남응원의 큰아들 남흥달(南興達)의 후손이 지금까지 일직면 망호2리 일대에 살고 있고, 작은아들 나재(懶齋) 남융달(南隆達, 1565~1652)은 풍산읍 매곡리에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남민생의 후손으로 영달한 이는 남부양의 5세손으로 노림서원(魯林書院)에 제향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 남의량의 8세손으로 문과에 올라 대사간을 지낸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 1670~1686), 역시 문과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한 남천택(南天澤, 1619~1684), 남우량의 8세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에 오른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 1620~1681), 남융달의 아들로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면서 쓴 『병자일기(丙子日記)』를 남기고 호조참판에 증직된 유유헌(由由軒) 남급(南礏, 1592~1671) 등이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는 구한말 안동군 동선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남흥, 장사리, 가장리, 석낭골[石郎谷], 세곡, 무학과 부내면의 율세리 일부를 병합하여 중가구동·중가구리로 와룡면에 편입되었다가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중가구1리와 2리의 2개 법정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가구1리는 석낭골, 동악(東嶽·東岳)골, 가장실(佳庄室), 남흥(南興) 등의 마을로 구분되며, 중가구2리는 동악골, 모골, 가느실[細谷]로 되어 있다.
석낭골은 서지재사 앞 가수내를 따라가다가 흥해배씨(興海裵氏) 가수천 재사 표지석이 나오면 그곳에서 가수천을 따라 더 들어가서 나오는 마을이다.
가장실은 남흥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약 320년 전 영양남씨(英陽南氏)와 안동권씨(安東權氏)가 개척하였으며 동구에 느티나무를 심어 놓고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였다 하여 가장실 또는 가장이라 하였다.
가느실은 가장실 동쪽에 있으며 앞은 세곡천이 흐른다. 남향 마을로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집성촌이다. 마을의 지형이 남쪽에서부터 좁고 길다고 하여 세곡 또는 가느실로 부르게 되었다. 마을에 동고(東皐) 안제(安霽)를 모시는 노봉리사(蘆峯理祠)라는 사당이 있다.
남흥은 가느실에서 약 2km 들어가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동향 마을이다. 남흥마을은 고려 말엽에 영양남씨가 입향하여 개척하였으며, 남씨의 집성촌이다. 옛날 남흥사(南興寺)란 절이 있었기 때문이란 설과 영양남씨들이 번성하게 살았다 하여 ‘남흥(南興)’이라는 설이 있다. 『영가지(永嘉誌)』의 「불우(佛宇)」 편을 보면 “부(府) 동쪽 음곡(陰谷) 아래에 남흥사가 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된 남휘주(南輝珠) 공의 묘가 있는데, 이 때문에 이 절의 이름이 남흥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남흥사가 창건되기 전부터 마을 이름은 이미 ‘남흥’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남흥재사(南興齋舍)는 낮은 산이 원형을 이루며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의 호 안에 우뚝 솟아 있다. 재사는 남향을 하고 서 있으며, 기단은 높다. 중앙에는 대문으로 오르는 7단의 자연석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그 좌우로는 2단의 높은 석축이 있다. 아래쪽 석축이 위쪽 석축보다 높다. 남흥재사는 두 채의 건물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동쪽에는 누각 건물이 있는데, 2칸 규모이다. 서쪽에는 헛간 건물이 있고, 3칸 규모이다. 두 건물 사이에는 약 1m 정도의 간격이 있는데, 벽으로 메워서 하나로 붙여버렸다. 동쪽 건물의 1층은 백색의 회벽과 나무틀과 그사이에 틀어박혀 있는 작은 1쪽 방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누각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키 낮은 난간이 앞면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다. 그 위로는 2칸 규모의 나무 벽이 있다. 또한 각 칸마다 밖으로 여닫게 되어 있는 두 쪽의 큰 나무 문이 달려 있다. 서쪽 건물은 1층이고, 3칸 규모인데, 서쪽의 두 칸은 중앙에 서로 층이 지는 나무판 벽을 두었고, 위아래로는 백토가 칠해져 있다. 서쪽 건물의 동쪽 한 칸은 대문 영역이다. 이 한 칸의 아래쪽 5분의 4는 나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 두 쪽의 큰 대문을 두었고, 그 양쪽으로는 세로의 나무판이 벽을 이루고 있다. 위쪽 5분의 1은 백토가 칠해져 있는데, ‘南興齋舍(남흥재사)’라는 글씨가 가로로 쓰인 검은 현판이 거의 앞부분을 가리고 걸려 있어, 벽의 색감이 앞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백토의 색감은 퇴색되어 흙 색깔을 띠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