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송씨 공산종택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은 자가 순좌(舜佐), 호가 공산(恭山), 본관이 야성(冶城)이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에서 송기선(宋祺善)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송대선(宋大善)에게 양자를 갔다. 5세에 조부 봉하(鳳下) 송홍익(宋鴻翼)에게 『소미통감(少微通鑑)』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웠고, 10세에 부친에게서 『소학』을 배웠으며, 13세에 족조(族祖) 거암(蘧菴) 송인각(宋寅慤)에게 『논어』를 배웠다. 18세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에게 집지(執贄)하였고, 20세에 시려(是廬) 황난선(黃蘭善, 1825~1908)에게 나아가 『논어』를 질의하였으며, 25세에는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1837~1902)에게 나아가 『논어』를 질의하였다. 30세에는 안동 서후 금계에 사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에게 학업을 익혔다. 이처럼 학문에 주력했지만, 송준필은 사사로운 이익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시의 혼란한 정세 탓에 선비들의 출사가 어려웠음은 물론 나라의 운명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오직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굳건한 독립을 지키는 데 뜻을 두었다. 송준필과 같은 유학자들의 뜻은 한결같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고 만다. 일본인들의 감시하에서는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1912년 “내 조선 땅을 떠나 조국의 독립에 나서야겠소”라고 하고선 만주로 망명을 결심했으나 망명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망명길에 올라 신의주에서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조국 독립의 열망을 품었으나 눈물을 머금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송준필은 독립을 향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조선 독립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대변한 사건이었다.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은 고을마다 울려 퍼졌고, 일본에 대한 분노도 그 어느 때보다 높이 타올랐다. 조선의 유림 역시 국제사회에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려 했다. 때마침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던 해였다. 게다가 승전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9년 1월 8일, 미 의회에 ‘대전 종결에 따른 14개조 원칙’을 제시했다. 그중에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자의 민족은 자치적 발달이 가장 자유로운 기회에 따라 처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인민과 영토는 주권과 주권 사이의 거래물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미국의 이와 같은 행보는 순수하지 않았다. 다민족 국가 소련을 무너뜨리고 독일 등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음에도 유림들은 파리 장서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파리 장서에는 송준필을 포함해 최학길(崔鶴吉), 이경균(李璟均), 이명균(李明均) 등의 지역 인사들이 서명했으며, 송준필은 그가 태어난 성주 백세각에서 독립 시위를 독려했다.
1919년 4월 송준필은 성주 3·1운동과 파리 장서 주모자로 일본 헌병 경찰에 체포되었다.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송준필을 대하는 일경들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거칠게 연행하는 방법을 포기하고, 송준필을 가마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유림의 종장 송준필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민중의 저항이 거세질 것을 예상한 일경들의 호구지책이었다. 송준필은 일경의 혹독한 심문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문 도중 조선인 출신의 일경이 파리 장서에 대해 묻자 송준필은 “너희들은 비록 우리 한인들의 이목을 엄폐하려 하나 세계의 각 신문에 이미 상세히 보도되었는데……”라며 거침없이 반일 감정을 드러냈다.
재판을 위해 대구지방법원에 도착하고 난 후에도 송준필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관해 좌중을 압도했다. 당시 수감자들은 강제로 머리를 깎아야 했지만 간수들은 감히 송준필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송준필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민중의 반발이 극심할 것을 알았기에 예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풍채의 송준필에게는 마치 큰 바위가 버티고 있는 듯한 위엄이 있었다. 옥고를 치르면서도 한결같았다. 독방에서 도포를 입고 지냈으며 “내 목은 차라리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가 죽기 전에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할 것이다”라며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이에 송준필보다 먼저 출감한 유학자들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송준필의 절개를 꼽았다.
송준필은 파리 장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김천시 부곡동 음지마을로 향했다. 송준필은 늘 “성리학 하는 사람은 나라를 잃으면 죽는 것이 낫다”고 되뇌었다. 평생토록 학문에 정진했으니, 글을 가르쳐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이후 송준필은 김천에서 학문을 완성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42년 원계서당(遠溪書堂)을 세운다. 송준필이 김천에 정착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퇴계학맥을 이은 송준필의 문하가 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제자가 모여들었다. 현재 알려진 송준필의 제자만 해도 300여 명에 이른다. 영남 지역은 물론 전라도·충청도에서도 공부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안타깝게도 송준필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원계서당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송준필의 제자들과 유림들은 송준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원계서원(遠溪書院)을 완공했다. 이듬해 서원 뒤편의 사당을 ‘숭덕사(崇德祠)’라 명명했다. 숭덕사 편액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왕이 편액을 하사한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편액이기에 ‘사액서원’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1971년 원계서원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했다. 1990년 정부는 송준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원계서원은 매년 춘향과 추향을 올려왔지만, 최근에는 매년 4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춘향만을 지내고 있다.
성리학에 관한 저서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으며, 예학에 관한 책으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 『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다.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넷(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 『한국의 편액Ⅰ』